영국의 퇴보 -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황혼

영국의 퇴보 -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황혼

1. 서론: 위대한 영국의 종언?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며 세계 질서를 주도했던 대영제국의 영광은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안정된 정치, 강력한 경제력, 그리고 전 세계에 걸친 영향력을 자랑했던 ’위대한 영국(Great Britain)’의 이미지는 오늘날 정치적 혼란, 경제적 침체, 그리고 분열된 국가 정체성이라는 냉엄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1 본 보고서는 현재 영국이 겪고 있는 ‘퇴보’ 현상이 단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오랜 기간 누적된 구조적 취약성이 최근의 정치적 선택, 특히 브렉시트(Brexit)라는 결정적 사건을 계기로 폭발적으로 드러난 결과임을 논증하고자 한다.

영국의 현주소는 세 가지 복합적인 위기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연합왕국의 위기’이다. 둘째, 저성장과 극심한 불평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경제 모델의 위기’이다. 셋째, 공공 서비스의 붕괴로 상징되는 ’국가 기능의 위기’이다. 브렉시트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 되기는커녕, 세 가지 위기 모두를 가속하는 강력한 촉매제로 작용했다.

본 보고서는 먼저 연합왕국을 내부로부터 좀먹는 균열의 양상(제1장)을 분석하고, 활력을 잃어가는 영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제2장)를 심층적으로 파헤친다. 이어서 영국 사회 계약의 근간을 흔드는 공공 서비스의 붕괴, 특히 국민보건서비스(NHS)의 위기(제3장)를 조명하며, 마지막으로 브렉시트 이후 새로운 국제적 역할을 모색하는 영국의 불확실한 항해(제4장)를 평가함으로써 영국 퇴보의 다층적 실체를 종합적으로 제시할 것이다.

2. 연합왕국의 균열 - 내부로부터의 붕괴

2.1 끝나지 않은 투쟁: 스코틀랜드 독립운동

1707년 연합법(Act of Union)으로 공식화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은 시작부터 긴장 관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두 지역은 문화적, 법률적, 민족적 정체성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여왔으며, 이러한 역사적 갈등의 골은 현대에 들어서도 아물지 않았다.2 현대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의 불씨는 역사적 반감에 더해, 북해 유전의 발견이라는 경제적 동력이 더해지면서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유전 수익이 스코틀랜드의 발전을 위해 쓰이지 않고 영국 중앙정부로 흡수된다는 비판은 독립의 경제적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논리가 되었다.3

이러한 독립운동에 결정적인 기폭제가 된 것은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였다. 영국 전체는 유럽연합(EU) 탈퇴를 선택했지만, 스코틀랜드는 62%라는 압도적인 수치로 EU 잔류를 지지했다.4 이는 스코틀랜드 유권자들의 의사가 거대한 잉글랜드 인구에 의해 무시당했다는 ‘민주적 결손(democratic deficit)’ 문제를 야기하며,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EU로부터 강제로 끌려 나간다는 깊은 박탈감을 심어주었다.5 특히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 주민투표 당시 반대 진영이 내세웠던 핵심 논리, 즉 ’영국에 남는 것이 EU 회원국 지위를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은 브렉시트로 인해 완벽하게 파훼되었다.2 이로써 스코틀랜드 독립 논의는 단순한 문화적, 경제적 불만을 넘어, 자신들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민주적 정당성과 유럽 정체성을 둘러싼 근본적인 질문으로 전환되었다. 독립은 이제 EU로 복귀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로 재정의되었고, 이는 독립운동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하고 새로운 명분을 부여했다.6

그러나 독립을 향한 열망이 다시 뜨거워졌음에도 그 길은 험난하다. 영국 대법원은 스코틀랜드 의회가 웨스트민스터 의회의 동의 없이 독자적으로 독립 주민투표를 실시할 법적 권한이 없다고 판결하며, 사실상 헌법적 교착 상태를 만들었다.6 또한, 독립 이후의 경제적 불확실성은 여전히 가장 큰 걸림돌로 남아있다. 영국 파운드화를 계속 사용할 것인지, 새로운 화폐를 도입할 것인지, 아니면 유로화를 채택할 것인지에 대한 통화 문제, 영국의 자산과 부채를 어떻게 분할할 것인지의 문제, 그리고 최대 교역 상대국인 잉글랜드와의 사이에 생겨날 국경 문제 등은 해결되지 않은 난제다.3 이러한 경제적 혼란 가능성 때문에 재계는 여전히 관망하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4

스코틀랜드의 이탈 가능성은 ’연합왕국’이라는 개념 자체에 실존적 위협을 가한다. 만약 스코틀랜드가 독립한다면, 이는 다른 구성국들의 분리주의 움직임을 자극하는 도미노 효과를 일으킬 것이 자명하다. 이미 브렉시트로 인해 경제적, 정치적 지형이 바뀐 북아일랜드에서는 아일랜드와의 통일 논의가 과거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정치 의제로 부상했다.4 웨일스의 독립운동은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스코틀랜드의 분리는 그들에게도 강력한 촉매제가 될 수 있다.4

2.2 웨스트민스터의 위기: 리더십의 부재와 정치적 난기류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영국 정치는 전례 없는 불안정의 시기를 겪었다. 각종 스캔들 속에 불명예 퇴진한 보리스 존슨, 무리한 감세 정책으로 금융 위기를 초래하며 44일 만에 낙마한 리즈 트러스, 그리고 당의 추락을 막지 못한 리시 수낵에 이르기까지, 보수당 총리가 연이어 교체된 것은 단순히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이념적 구심점을 잃고 통치 능력을 상실한 정당의 단면을 보여주는 증상이었다.9

이러한 정치적 혼란의 정점은 2024년 조기 총선이었다. 선거 결과, 집권 보수당은 1831년 창당 이래 최악의 성적표를 받으며 역사적인 참패를 당했고, 키어 스타머가 이끄는 노동당은 압도적인 의석을 확보하며 14년 만에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10 이는 노동당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라기보다는, 14년간 이어진 보수당 정권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짙었다.10 유권자들의 분노를 촉발한 핵심 요인은 계속되는 경제 침체와 생활비 위기, NHS로 대표되는 공공 서비스의 붕괴, 그리고 정치권 전반에 대한 깊은 불신과 피로감이었다.10

이처럼 웨스트민스터의 정치적 혼란은 브렉시트가 남긴 해결되지 않은 모순의 직접적인 결과물이다. ’브렉시트 완수’를 내걸고 집권한 보수당은 그 실질적이고 이념적인 후폭풍 속에서 분열되었다. 주권 회복과 경제적 이익이라는 상충하는 약속 사이에서 정책적 일관성을 상실했고, 이는 결국 통치 불능 상태로 이어졌다. 보리스 존슨은 브렉시트가 낳은 예외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터진 스캔들로 몰락했고, 리즈 트러스의 급진적 감세안은 ’강경 브렉시트’의 경제적 충격을 실현하려다 자멸한 시도였다.9 리시 수낵은 뚜렷한 비전 없이 경제적 잔해를 수습하는 데 급급했다.9 국민들은 이 모든 혼란을 목도하며 경제와 공공 서비스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봤고, 결국 선거를 통해 단호하게 등을 돌렸다. 즉, 브렉시트를 주도했던 정당이 역설적으로 브렉시트 때문에 자멸한 셈이다. 노동당은 압도적 승리를 거뒀지만, 정치에 대한 신뢰가 바닥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망가진 경제와 공공 서비스를 제한된 재원으로 재건해야 하는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10

3. ’영국병’의 재발? - 경제적 활력의 상실

3.1 두 개의 국가: 수도권과 소외된 지역

영국은 선진국 중 가장 지역 불균형이 심각한 국가 중 하나로 꼽힌다.15 수도 런던 및 남동부 지역과 나머지 지역 간의 경제적 격차는 단순히 통계상의 수치를 넘어, 두 개의 다른 나라라고 할 만큼 거대하다. 런던의 생산성은 맨체스터보다 41%나 높은데, 이는 프랑스 파리와 리옹의 격차(26%)를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다.16 1인당 가처분소득 역시 런던이 북동부 지역의 약 두 배에 달한다.15 이러한 불균형은 경제 지표에만 그치지 않고, 건강 기대수명과 같은 사회적 결과의 격차로까지 이어진다.17

이러한 뿌리 깊은 불평등은 1980년대 대처리즘의 유산이다. 당시 정부는 금융 서비스 규제 완화(빅뱅)를 통해 런던 중심의 금융 산업을 육성하는 동시에, 북부와 중부 지역의 석탄, 철강 등 전통적인 중공업의 쇠퇴를 방치했다.15 그 결과 영국 경제는 세계화된 금융 서비스 중심의 런던과, 산업 기반을 잃고 정체된 나머지 지역이라는 이중 구조로 고착화되었고, 이 구조적 불균형은 수십 년간 이어져 왔다.15

2016년 브렉시트 투표는 이러한 ’소외된 지역(left-behind regions)’의 정치적 반란으로 해석될 수 있다.15 수십 년간의 경제적 방치, 이민자 증가에 대한 불안, 그리고 공공 서비스 악화에 대한 불만이 누적된 상황에서, EU와 ’런던 엘리트’에게 책임을 돌리는 포퓰리즘적 메시지는 강력한 호소력을 가졌다.15 정부가 뒤늦게 ‘레벨링 업(Levelling Up)’ 정책을 내세웠지만, 이는 근본적인 구조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17

구분런던남동부북동부북서부웨일스스코틀랜드
1인당 GVA (2021년, £)56,36834,44123,76726,98824,85632,348
1인당 가처분소득 (2021년, £)29,36224,96417,46618,74618,13120,417
건강 기대수명 (남성, 2018-20년)63.964.959.560.761.060.9
건강 기대수명 (여성, 2018-20년)63.965.659.861.260.661.8

표 1: 영국 내 지역별 경제 및 사회 지표 격차 비교 (자료: ONS 15)

3.2 브렉시트의 경제적 성적표

브렉시트 투표 이후 영국 경제는 지속적으로 다른 선진국에 비해 부진한 성과를 보였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의 경제 회복세는 다른 G7 국가들에 비해 눈에 띄게 더뎠다.19 이미 2016년 이전부터 약화되었던 생산성 증가율은 거의 정체 상태에 빠졌다.16 영국은 심각한 생활비 위기에 시달렸는데, 2022년 10월에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1.1%까지 치솟았다.17 이는 브렉시트 이후 발생한 무역 마찰, 파운드화 약세, 그리고 수입 식료품 및 에너지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EU 단일시장과 관세동맹 탈퇴는 영국 최대 교역 상대국과의 사이에 상당한 무역 장벽을 세웠다. 이는 영국과 EU 간의 교역량을 감소시키고 기업의 비용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9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입은 여전히 상당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지만, 일부 기업들이 EU 시장에 대한 원활한 접근을 위해 사업장을 EU 역내로 이전하면서 그 증가세는 둔화되었다.19

3.3 런던 금융허브의 현주소: 흔들리는 왕좌

브렉시트 이후 런던이 금융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할 것이라는 예측은 과장된 것으로 드러났지만, 그 압도적인 위상이 약화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제금융센터지수(GFCI)에 따르면 런던은 여전히 뉴욕에 이어 세계 2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21 외환 거래, 국제 채권 발행 등 핵심 분야에서는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21 우려했던 대규모 일자리 이탈은 예상보다 적었으며, 2023년 말 기준 금융 부문 전체 고용자 수는 2009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22

하지만 브렉시트는 실질적인 상처를 남겼다. EU 회원국 내에서 자유롭게 영업할 수 있었던 ‘패스포팅’ 권한을 상실하면서, 많은 금융기관들이 유럽 고객 서비스를 위해 인력과 자산을 더블린, 파리, 프랑크푸르트 등 새로운 EU 허브로 이전해야만 했다.23 런던은 여전히 강력하지만, 경쟁 도시들과의 격차는 좁혀졌고 25, 유럽으로 통하는 유일무이한 관문이라는 지위는 잃었다. 특히 유로화 표시 자산 거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감소하는 등 구체적인 타격도 나타났다.22 영국의 금융 서비스 산업은 여전히 경제의 핵심 동력이지만, 이제는 한 손이 묶인 채 경쟁에 나서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영국 경제는 악순환의 고리에 갇힌 형국이다. 지역 불균형이라는 구조적 병폐가 브렉시트라는 정치적 결정을 낳았고, 그 결정이 다시 국가 경제 전체를 약화시켜 최초의 문제였던 지역 불균형을 해소할 여력마저 앗아가고 있다. 이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국가 경제 전략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지만, 아직 어떤 정부도 그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4. 국가적 자부심의 상처 - NHS 붕괴 위기

4.1 통계로 본 위기: 대기 시간, 만족도, 그리고 ‘초과 사망’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기치 아래 설립된 국민보건서비스(NHS)는 오랫동안 영국인들의 가장 큰 자부심이자 사회 계약의 상징이었다.26 그러나 오늘날 NHS는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총체적 위기 상황에 놓여있다. 관련 통계는 재앙적인 수준이다. NHS에 대한 국민 만족도는 24%까지 추락했는데, 이는 관련 조사가 시작된 1983년 이래 가장 낮은 수치다.27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근본적인 원인은 기록적인 진료 대기 시간이다. 2024년 기준, 정규 병원 치료를 기다리는 대기자 명단에 오른 사람만 625만 명에 달한다.28 1년 이상 치료를 기다리는 환자 수는 2010년 2만 명 수준에서 30만 명으로 15배나 폭증했다.27 응급 의료 체계는 사실상 붕괴 상태다. 응급실을 찾은 환자들이 위험할 정도로 긴 시간을 대기해야 하는 상황이 일상화되었고, 영국 응급의학회(Royal College of Emergency Medicine)는 이러한 응급실 지연으로 인해 매년 1만 4,000명에 달하는 ’초과 사망’이 발생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26 의료 시스템의 관문 역할을 하는 일반의(GP) 접근성 역시 심각하게 악화되어, 진료 예약에 평균 19일이 소요되고 있다.28

핵심 성과 지표2010년2024년변화
국민 만족도70%24%-46%p
총 치료 대기자 수약 250만 명625만 명+150%
1년 이상 대기 환자 수2만 명30만 명+1400%
응급실 4시간 내 진료 비율95% 이상72.1%-23%p
응급실 지연 관련 추정 초과 사망자 (연간)미미14,000명급증

표 2: NHS 핵심 성과 지표 변화 추이 (2010년 대비 2024년) (자료: The King’s Fund, NHS England 26)

4.2 위기의 근원: 만성적 투자 부족과 구조적 문제

NHS 붕괴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2010년 보수당 연립정부 출범 이후 10년간 이어진 고강도 긴축재정이다. 이 기간 동안 NHS 예산 증가율은 연평균 1% 수준으로 억제되었는데, 이는 인구 고령화와 의료 기술 발전에 따른 수요 증가를 감당하기 위해 필요했던 과거 평균 증가율 3.4%에 턱없이 부족한 수치였다.26 이러한 만성적인 투자 부족은 병원 건물, MRI 스캐너와 같은 의료 장비, 그리고 기술 현대화를 위한 자본을 고갈시켰고, 이는 낡은 인프라와 생산성 저하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26

여기에 영국의 급속한 인구 고령화는 시스템에 가해지는 압박을 가중시켰다. 고령 환자는 여러 질병을 동시에 앓는 복합상병을 가질 확률이 높고, 더 집중적인 치료를 필요로 한다.30 특히 치매와 같은 노인성 질환의 유병률이 급증하고 있으며, 관련 사회적 비용은 2040년까지 세 배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30

마지막으로 NHS는 심각한 인력난에 직면해 있다. 의사, 간호사를 비롯한 필수 의료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며 28, 이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누적된 의료진의 번아웃과 브렉시트 이후 유럽 대륙 출신 인력의 채용이 어려워지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NHS의 붕괴는 단순한 정책 실패를 넘어선다. NHS는 부와 상관없이 누구나 필요할 때 치료받을 수 있다는 보편적 의료의 원칙을 구현하는, 영국인들의 정체성과 사회 계약의 핵심 기둥이었다.26 추상적인 경제 지표와 달리, 사랑하는 가족이 고통 속에서 수술을 기다리고, 아파도 의사를 만날 수 없으며, 응급실에서 공포에 떨어야 하는 경험은 모든 국민에게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고통으로 다가온다. 국가가 가장 필요할 때 국민을 보호해주리라는 약속이 눈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국민적 자부심은 깊은 상처를 입었고 이는 보수당 정권에 대한 거대한 정치적 분노로 응집되었다. NHS 위기는 영국 퇴보 서사의 감정적 핵심이자, 2024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역사적 참패를 당한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0

5. 글로벌 브리튼의 고독한 항해

5.1 외교적 재정의: 브렉시트 이후의 세계 전략

브렉시트 이후 영국 정부는 ’글로벌 브리튼(Global Britain)’이라는 새로운 외교 비전을 제시했다.31 그 핵심은 EU라는 틀에서 벗어나 미국, 영연방 등 전통적 우방과의 관계를 재확인하고,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인도-태평양 지역과의 새로운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것이었다.31 이는 유럽에 얽매이지 않고 전 세계를 무대로 자유무역을 선도하는, 자신감 넘치는 국가의 이미지를 투사하려는 시도였다.31

그러나 ’글로벌 브리튼’의 실제 항해는 험난했다. 브렉시트가 초래한 경제적 타격은 영국의 외교적 입지를 약화시켰고, 지정학적 환경은 더욱 복잡해졌다.19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는 유지되고 있지만, 유럽으로 통하는 교두보로서의 영국의 전략적 가치는 감소했다. 인도-태평양으로의 ’전략적 중심축 이동(pivot)’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과 같은 일부 성과를 거두었지만, 해당 지역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영국의 군사적, 경제적 역량이 제한적이다.

이러한 전략적 딜레마는 대중국 정책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초기 ’글로벌 브리튼’은 중국과의 실용적인 경제 관계를 추구했다.32 하지만 홍콩 국가보안법 사태와 신장 위구르 인권 문제, 그리고 화웨이 사태로 불거진 국가 안보 위협 등으로 인해 대중국 정책은 급격히 강경 노선으로 선회했다.32 이는 영국을 미국과 더욱 밀착시켰지만, 동시에 경제적 목표 달성을 복잡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5.2 여전히 강력한가?: 소프트파워와 과학 기술의 명암

정치·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여전히 세계 최상위권의 소프트파워 강국이다.34 그 영향력의 원천은 깊고 다양하다.

  • 언어: 세계 공용어인 영어는 그 자체로 영국의 문화와 사상을 전파하는 가장 강력한 자산이다.34

  • 문화: 영국의 음악, 영화, 문학, 그리고 프리미어리그로 대표되는 스포츠는 전 세계적으로 막대한 팬덤을 보유하고 있다.34

  • 제도: BBC,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들, 영국문화원, 심지어 영국 왕실까지도 강력한 문화적, 제도적 이미지를 전 세계에 투사한다.34

  • 네트워크: 56개국으로 구성된 영연방(Commonwealth)은 비록 비공식적이지만 역사적, 문화적 유대를 유지하는 독특한 네트워크를 제공한다.34

과학기술 분야 역시 영국의 전통적인 강점이다. 생명과학, 인공지능(AI), 통신 등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기반을 갖추고 있으며 37, 영국 정부는 이 분야들을 미래 성장 동력으로 지정하고 브렉시트 이후에도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야심 찬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40 하지만 브렉시트는 이러한 과학 생태계에 큰 위협이 되었다.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과 같은 EU의 거대 연구 기금에 대한 접근이 차단되고 유럽 대륙의 우수 인재 유치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비록 영국이 최근 호라이즌 유럽 프로그램에 재가입했지만, 초기의 불확실성이 남긴 상처는 여전하며, ’과학기술 초강대국’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40

현재 영국의 가장 큰 도전은 역사와 문화적 개방성에 뿌리를 둔 ‘소프트파워’ 자산과, 브렉시트로 인해 실질적으로 약화된 ‘하드파워’(경제력, 정치적 영향력) 사이의 괴리가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글로벌 브리튼’ 전략은 본질적으로 전자를 활용하여 후자의 쇠퇴를 만회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계를 향한 개방과 협력을 외치면서, 정작 가장 가깝고 거대한 정치·경제 공동체인 EU에서는 탈퇴했다는 근본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결국 영국은 과거에 쌓아 올린 명성에 기대어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고 있지만, 그 야심 찬 목표를 실현하기에는 경제적, 지정학적 기반이 약화된 것이 현실이다. ’글로lobal Britain’은 현실적 전략이라기보다는, 세계 속에서 축소된 자신의 위상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국가의 열망이 담긴 구호에 가깝다.

6. 결론: 퇴보를 넘어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인가

본 보고서가 제시한 증거들을 종합해 볼 때, 영국은 비록 파탄 국가는 아닐지라도 명백한 상대적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심각한 내부 분열, 뿌리 깊은 불평등에 기반한 경제 침체, 사회 시스템의 근간인 공공 부문의 붕괴, 그리고 세계 무대에서의 역할 재정립을 위한 고투가 현재 영국의 모습을 규정한다.

브렉시트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었음이 분명해졌다. 오히려 기존의 문제들을 악화시키는 기폭제로 작용했으며, 경제적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채 내부의 정치적 균열을 심화시키고 국제적 위상을 약화시켰다.

2024년 총선을 통한 정권 교체는 잠재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노동당 정부는 극도로 양극화된 사회 분위기와 제한된 재정 능력이라는 제약 속에서, 수십 년간 누적된 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거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

퇴보의 흐름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정부를 교체하는 것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영국의 경제 모델, 연합왕국의 본질, 그리고 21세기 세계 속에서 자국이 차지할 현실적인 위치에 대한 근본적인 국가적 성찰이 요구된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자기 진단 없이는, 한때 위대했던 이 나라의 길고 느린 황혼은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7. 참고 자료

  1. 대영제국의 흥망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180912166000005
  2. 스코틀랜드, 독립은 없지만 변화는 있다 - 충북대학교종합언론미디어(충북대신문) - CBNUMEDIA, https://press.cbnu.ac.kr/ktimes/articles/119/20141006/20141006100900.html
  3. 끝나지 않은 스코틀랜드의 독립 소망 | click 경제교육, https://eiec.kdi.re.kr/material/clickView.do?click_yymm=201411&cidx=2254
  4. 스코틀랜드 독립운동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8A%A4%EC%BD%94%ED%8B%80%EB%9E%9C%EB%93%9C%20%EB%8F%85%EB%A6%BD%EC%9A%B4%EB%8F%99
  5. 스코틀랜드의 독립 실패와 현재의 정치적 혼란 - 내외신문, https://www.naewaynews.com/313480
  6. 스코틀랜드의 독립 열망..잉글랜드와의 갈등의 역사 - 내외신문, https://www.naewaynews.com/314678
  7. “브렉시트 하면 우리도 독립”…스코틀랜드 수만명 시위 -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892666.html
  8. 브렉시트가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논의에 미친 영향, https://newspeppermint.com/2017/02/21/scoxit-scottish-independence/
  9. [한눈에 이슈] 영국 보수당은 왜 실패했나…혼돈의 영국 정치, 14년 …, https://www.youtube.com/watch?v=XM-apYf6NV8
  10. 영국 노동당, 14년 만에 정권 교체…수낵 총리 사의 표명 / KBS …, https://www.youtube.com/watch?v=fRYztMAyF-s
  11. 영국 총선서 보수당 190년 만에 최악 참패 | 뉴스A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OJSIGx7VMYM
  12. 영국 노동당, 14년 만에 정권 교체…스타머 총리 “변화 시작” / KBS 2024.07.06.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T2KIZ33QwLI
  13. 영국 총선 노동당 압승·보수당 참패…“14년 만에 정권 교체” / YTN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Uk1L0OtQhzg
  14. 수낵 영국 총리, 총선 패배 인정 “책임지겠다” / KBS 2024.07.05.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QpJcFWog9g
  15. 영국의 지역 격차, 브렉시트(Brexit), 지역발전정책 동향 … - 국토연구원, https://www.krihs.re.kr/galleryPdfView.es?bid=0025&list_no=27992&seq=1
  16. [FINANCIAL TIMES 제휴사 칼럼] 경기침체 빠진 영국, 돌파구 절실하다 - 매일경제, https://www.mk.co.kr/news/contributors/10895767
  17. 영국 지역균형발전 정책 현황과 시사점 - KDB미래전략연구소, https://rd.kdb.co.kr/fileView?groupId=4D40972E-FEE7-304D-E64C-BD0DBB617EFD&fileId=2EAA46A9-7A99-8012-E329-A58149917A78
  18. 영국의 지역 격차 해소를 위한 움직임 – ‘레벨링업(Levelling Up)’ - 스마트시티 종합포털, https://smartcity.go.kr/2023/09/11/%EC%98%81%EA%B5%AD%EC%9D%98-%EC%A7%80%EC%97%AD-%EA%B2%A9%EC%B0%A8-%ED%95%B4%EC%86%8C%EB%A5%BC-%EC%9C%84%ED%95%9C-%EC%9B%80%EC%A7%81%EC%9E%84-%EB%A0%88%EB%B2%A8%EB%A7%81%EC%97%85lev/
  19. 브렉시트 5년: 평가와 시사점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https://www.kiep.go.kr/galleryDownload.es?bid=0003&list_no=11662&seq=1
  20. 영국의 생활비 위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EC%98%81%EA%B5%AD%EC%9D%98_%EC%83%9D%ED%99%9C%EB%B9%84_%EC%9C%84%EA%B8%B0
  21. 브렉시트 이후 영국 경제상황과 금융산업 평가 및 시사점 | KIEP 세계경제 포커스 | 현안자료, https://www.kiep.go.kr/gallery.es?mid=a10102030000&bid=0004&act=view&list_no=11311
  22. 브렉시트 이후 영국 경제상황과 금융산업 평가 및 시사점, https://www.kiep.go.kr/galleryDownload.es?bid=0004&list_no=11311&seq=1
  23. 브렉시트에 따른 런던의 금융중심지 위상 변화 - 자본시장연구원, https://www.kcmi.re.kr/publications/pub_detail_view?syear=2019&zcd=002001016&zno=1451&cno=5173
  24. 브렉시트에 따른 런던의 금융중심지 위상 변화 - 자본시장연구원, https://www.kcmi.re.kr/common/downloadw?fid=22889&fgu=002001&fty=004003
  25. 런던 금융시장이 저문다 - 은행·증권 - 중소기업투데이, http://www.sbiztoday.kr/news/articleView.html?idxno=23805
  26. 영국의 자랑에서 재앙으로… 의료서비스 NHS ‘위기’ - 국민일보,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020522600
  27. “응급실 대기로 연 1.4만명 죽는다”…영국도 공공의료 대위기 - 세계일보, https://www.segye.com/newsView/20240913505961
  28. 공공의료 기반 英 NHS 만족도 21%…19일 기다려야 GP 진료 - 청년의사, http://www.docdocdoc.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27340
  29. ‘공공의료 실패’ 이 나라, 응급실 대기하다 연 1.4만명 죽는다 - 서울경제, https://www.sedaily.com/NewsView/2DE9Z31X2G
  30. 고령화시대 영국 국가보건의료서비스(NHS)의 과제와 전망 - 한국보건사회연구원, https://www.kihasa.re.kr/gssr/v.1/%EC%97%AC%EB%A6%84/7/%EA%B3%A0%EB%A0%B9%ED%99%94%EC%8B%9C%EB%8C%80+%EC%98%81%EA%B5%AD+%EA%B5%AD%EA%B0%80%EB%B3%B4%EA%B1%B4%EC%9D%98%EB%A3%8C%EC%84%9C%EB%B9%84%EC%8A%A4+NHS+%EC%9D%98+%EA%B3%BC%EC%A0%9C%EC%99%80+%EC%A0%84%EB%A7%9D
  31. Brexit 관련 영국 외교정책에 관한 Boris Johnson 외교장관 채텀하우스 연설 상세보기|영국 정세 | 주영국 대한민국 대사관 겸 주국제해사기구 대한민국 대표부 - 외교부, https://overseas.mofa.go.kr/gb-ko/brd/m_8388/view.do?seq=1269492&srchFr=&srchTo=&srchWord=&srchTp=&multi_itm_seq=0&itm_seq_1=0&itm_seq_2=0&company_cd=&company_nm=
  32. 글로벌 브리튼과 영국의 대(對)중국 정책 - 외교안보연구소, https://www.ifans.go.kr/knda/com/fileupload/FileDownloadView.do;jsessionid=NVtOcNJcEMykVYI24sZ67v-u.public11?storgeId=c61b04e5-0182-4c75-ad21-828ecacfb855&uploadId=26694399734947151&fileSn=1
  33. 국내 정치와 외교: 포스트 브렉시트 외교로서의 ‘글로벌 브리튼’ - 외교안보연구소 홈페이지, http://www.ifans.go.kr/knda/ifans/kor/pblct/PblctView.do?csrfPreventionSalt=null&sn=&bbsSn=&mvpSn=&searchMvpSe=&koreanEngSe=KOR&ctgrySe=&menuCl=P03&pblctDtaSn=13695&clCode=P03&boardSe=
  34. 소프트 파워/국가 순위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86%8C%ED%94%84%ED%8A%B8%20%ED%8C%8C%EC%9B%8C/%EA%B5%AD%EA%B0%80%20%EC%88%9C%EC%9C%84
  35. 소프트파워 최강국 영국 한국 20위권 다시 진입 - 이코노미인사이트, http://www.economyinsight.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98
  36. 모음, https://welcon.kocca.kr/cmm/fms/CrawlingFileDown.do?atchFileId=FILE_30b9f201-c97c-4561-86ea-e9d456a81045&fileSn=1
  37. [동향]영국, R&D 투자 현황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https://scienceon.kisti.re.kr/srch/selectPORSrchTrend.do?cn=GT200501150
  38. 영국이 확실한 R&D 목적지인 이유, https://uktin.net/sites/default/files/2024-03/HVD3508%20UKTIN%20WP%20route%202%20V6%20-%20US%20English_KR.pdf
  39. [대사관칼럼:영국스케치 ⑬] 영국의 생명과학, 그 경쟁력의 비결은? - 외교부, https://overseas.mofa.go.kr/gb-ko/brd/m_8385/view.do?seq=1342444&page=8
  40. Untitled - KISTEP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https://www.kistep.re.kr/boardDownload.es?bid=0031&list_no=93417&seq=1
  41. [동향]영국, 기업들의 연구개발 투자 증가 추세, https://scienceon.kisti.re.kr/srch/selectPORSrchTrend.do?cn=GT200602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