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그리고 조약 파기 권한에 대한 분석 보고서
1. 서론
본 보고서는 세 가지 핵심 주장에 대한 법리적, 역사적, 그리고 현실적 차원의 심층 분석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25% 관세 부과 위협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 이하 한미 FTA) 위반이다. (2) 이러한 관세 부과는 사실상 한미 FTA를 파기하겠다는 것과 동일하다. (3) 조약의 파기는 미국 대통령이 아닌 의회의 고유 권한이다.
이러한 주장은 표면적으로는 타당해 보이나, 실제로는 세 가지 상이한 법적 체계가 복잡하게 얽혀 상호작용하는 다층적 사안의 단면만을 보여준다. 이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법적 틀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첫째, 양국 간의 구체적인 약속을 담고 있는 국제법 체계, 즉 한미 FTA 협정문 자체의 규정. 둘째, 미국 대통령에게 특정 권한을 부여하는 미국 국내법 체계, 특히 무역확장법 제232조. 셋째, 미국 정부 내 권력의 분배를 규율하는 미국 헌법 체계, 즉 대통령과 의회 간의 권력 분립 원칙이다.
본 보고서는 각 장에서 이러한 법적 체계들을 근거로 주장을 하나씩 체계적으로 검증하고, 그 이면에 숨겨진 법적 논리와 정치적 현실을 명확히 규명할 것이다. 이를 통해 단순한 사실관계를 넘어 사안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제공하고자 한다.
2. 한미 FTA의 핵심 원칙: 관세 철폐의 약속
2.1 한미 FTA의 근본적 목표와 구조
한미 FTA는 2007년 4월 타결되어 2012년 3월 15일 발효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포괄적인 자유무역협정이다.1 이 협정은 단순히 특정 상품의 관세를 낮추는 수준을 넘어 상품, 무역구제, 서비스, 투자, 경쟁, 지식재산권, 정부조달, 노동, 환경 등 무역과 관련된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높은 수준의 규범을 담고 있다.3 협정의 근본적인 목표는 양국 간의 무역 장벽을 제거하여 재화와 서비스의 자유로운 이동을 촉진하고, 이를 통해 양국의 경제적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 있다.
이러한 포괄적 구조 속에서도 협정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약속은 단연 ’관세 철폐’에 있다. 협정 발효 이전, 양국은 서로의 상품에 대해 각자의 국내법에 따라 관세를 부과할 주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미 FTA는 이러한 관세 주권의 일부를 상호 유보하고, 협정문에 명시된 세율과 철폐 계획을 따르기로 한 법적 약속이다. 이는 일방이 자국의 국내 정치·경제적 상황 변화를 이유로 임의로 관세를 부과할 수 없도록 상호 구속하는 장치로서 기능한다.4
2.2 구체적 관세 철폐 계획
한미 FTA는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한 관세 철폐 계획을 담고 있다. 이는 협상이 양국의 민감한 산업 분야까지 고려한 정교한 이해관계 조정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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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품: 협정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는 공산품 분야의 높은 수준의 시장 개방이다. 협정 발효 후 5년 이내에 양측 모두 대부분의 공산품에 대한 관세를 철폐하기로 합의했다. 구체적으로 품목 수 기준 5년 내 한국 측은 96.1%, 미국 측은 94.9%의 품목에 대한 관세가 사라졌다.3 이는 당시 미국이 체결한 FTA 중 가장 높은 수준의 개방을 의미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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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및 부품: 양국의 핵심 수출입 품목인 자동차 분야는 특히 중요한 협상 대상이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수출되는 완성차(승용차 기준)에 부과되던 2.5%의 관세는 협정 발효 후 5년째에 폐지되었고, 미국산 자동차에 부과되던 8%의 관세는 발효 즉시 4%로 인하된 후 4년 뒤 완전히 폐지되었다.1 특히 중소기업의 영역인 자동차 부품의 경우, 양측 모두 협정 발효 즉시 관세를 철폐하여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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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축산물: 국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농축산물 분야는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졌다. 쌀은 아예 양허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쇠고기, 돼지고기, 고추, 마늘 등 민감 품목에 대해서는 15년 이상의 장기적인 관세 철폐 기간을 설정하거나, 특정 기간에만 낮은 관세를 적용하는 계절관세, 수입 급증 시 추가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농산물 세이프가드 등 다양한 예외 장치를 마련했다.3
이처럼 한미 FTA는 각 품목의 민감도를 반영하여 즉시 철폐, 3년 내 철폐, 5년 내 철폐, 10년 이상 장기 철폐, 양허 제외 등 다양한 형태의 관세 철폐 계획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관세가 FTA로 정해졌다’는 인식이 사실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이는 한미 FTA가 단순한 정책적 선언이 아니라, 양국의 국내 관세법보다 상위의 효력을 갖는 구속력 있는 ’법적 약속’으로 설계되었음을 의미한다. 협정 제2.2조에서 명시한 ‘내국민 대우’ 원칙, 즉 수입품을 국내 생산품과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규정은 이러한 관세 철폐 약속을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근간이 된다.7 따라서 한미 FTA의 틀 밖에서 일방적으로 25%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위협은 단순한 무역 마찰을 넘어, 이 법적 약속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로 인식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바로 이 사안이 ‘조약 위반’ 논란으로 비화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3. 25% 관세 부과 논쟁: FTA 위반인가, 예외의 적용인가?
3.1 미국 행정부의 법적 방패: 무역확장법 제232조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을 포함한 여러 교역 상대국에 25%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을 때, 그 직접적인 법적 근거로 내세운 것은 한미 FTA 협정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1962년에 제정된 미국의 국내법인 ’무역확장법 제232조(Section 232 of the Trade Expansion Act of 1962)’였다.8 이 법은 미국 통상 정책의 역사에서 강력한 보호무역 수단으로 기능해왔다.
무역확장법 제232조의 핵심 내용은, 특정 제품의 수입이 미국의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고 판단될 경우’ 미국 대통령이 상무부의 조사를 거쳐 직권으로 수입을 제한하는 조치(고율 관세 부과, 수입 물량 제한(쿼터) 등)를 취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8 여기서 가장 중요한 법리적 쟁점은 ’국가 안보(national security)’의 개념이다. 제232조는 이 개념을 매우 광범위하고 유연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전통적인 의미의 국방 및 군사적 안보뿐만 아니라, 특정 수입품이 국내 관련 산업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거나, 실업 문제를 야기하거나, 국가 경제 전반의 건전성을 해치는 경우까지도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할 수 있다.8 이러한 포괄적 정의는 사실상 미국 행정부에게 특정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무역 장벽을 세울 수 있는 막대한 재량권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
3.2 FTA 의무와 232조 조치의 충돌
한미 FTA에 따라 관세를 철폐하기로 약속한 상황에서, 미국이 국내법인 제232조를 근거로 일방적인 관세를 부과하는 것은 명백한 약속 위반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국 행정부는 이러한 조치가 FTA를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논리는 제232조 조치가 한미 FTA 협정문 자체에 내재된 ’예외 조항’을 이행하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한미 FTA 제23.2조 ‘필수안보’ 조항은 “이 협정의 어떠한 규정도 당사국이 자신의 필수적인 안보 이익의 보호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간주하는 조치를 적용하는 것을 막는 것으로 해석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11 이 조항은 세계무역기구(WTO)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제21조의 안보 예외 조항을 거의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미국 행정부는 제232조에 따른 철강, 자동차 등에 대한 관세 부과가 바로 이 ’필수적인 안보 이익 보호’를 위한 조치이므로, FTA 위반이 아니라 오히려 FTA가 허용하는 예외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법리적 쟁점은 ’25% 관세 부과’라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를 정당화하는 ’국가 안보’라는 명분이 과연 타당한가라는 문제로 전환된다. 즉, 철강이나 자동차 수입이 정말로 미국의 ’필수적인 안보 이익’을 위협하는지에 대한 해석의 싸움이 된 것이다. 이는 명확한 답이 없는 법적 회색지대를 만들어내며, 법적 다툼보다는 정치적 협상을 유도하는 결과를 낳는다.
3.3 실제 적용 사례 분석: 철강 협상
이러한 법적 회색지대를 활용한 협상 전술의 대표적인 사례가 2018년 한국산 철강에 대한 232조 조치 협상이다. 당시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수입되는 철강 제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한미 FTA의 관세 철폐 약속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조치였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전면적인 관세 부과가 아니었다. 한국 정부와의 막판 협상을 통해, 미국은 한국산 철강을 관세 부과 대상 국가에서 제외했다. 그 대신, 한국은 대미 철강 수출 물량을 최근 3년 평균 수출량의 70% 수준으로 자율적으로 제한하는 ’수출 쿼터(수출 할당량)’를 수용했다.12
이 사례는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 25% 관세 위협은 그 자체로 최종 목적이 아니라, 상대방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강력한 압박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둘째, 문제 해결 방식은 FTA를 완전히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협정의 틀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합의(쿼터 설정)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FTA 개정이나 부속서한(side letter) 작성을 통해 양국 간의 이해관계를 재조정하는 형태에 가깝다.4 결국 이 사례는 ’관세 부과 = 조약 파기’라는 등식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25% 관세 위협은 FTA라는 국제 규범을 무시한 불법 행위라기보다는, FTA(안보 예외 조항)와 국내법(232조) 사이에 존재하는 규범의 회색지대를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자국에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초법규적 협상 전술’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 항목 | 한미 FTA 관세 원칙 | 무역확장법 232조 조치 |
|---|---|---|
| 법적 근거 | 한미 FTA 협정문 (국제법) | 미국 무역확장법 제232조 (미국 국내법) |
| 목표 | 상호 관세 철폐를 통한 교역 증진 및 공동 이익 추구 | 특정 수입품으로부터 미국 국가 안보 및 국내 산업 보호 |
| 정당성 논리 | 양국 간의 자발적이고 구속력 있는 법적 합의 | 국가 안보 보호를 위한 대통령의 고유 권한 행사 |
| 발동 주체 | 양국 정부의 합의 | 미국 대통령의 단독 결정 (상무부 조사 기반) |
| 해결 방식 | 협정 내 분쟁해결절차, 공동위원회 협의 또는 개정 협상 | 일방적 조치 부과 또는 협상을 통한 국가별 예외 인정 |
4. 조약 파기 권한의 소재: 미국 대통령 대 의회
4.1 미국 헌법의 침묵
세 번째 주장, 즉 ’조약 파기는 의회의 권한’이라는 명제는 미국 헌법의 권력 분립 원칙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이 주장의 타당성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먼저 미국 헌법의 관련 조항을 살펴봐야 한다.
미국 헌법 제2조 제2항은 대통령이 “상원의 조언과 동의(by and with the Advice and Consent of the Senate)를 얻어 조약을 체결할 권한(Power to make Treaties)을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상원의 동의’는 출석 상원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의미한다.13 이처럼 헌법은 조약의 ‘체결’ 절차에 대해서는 대통령과 상원의 역할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헌법은 조약을 ’파기(terminate)’하는 절차나 그 권한의 주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15 이 ’헌법적 침묵’이 바로 지난 200여 년간 미국 내에서 대통령과 의회 간에 조약 파기 권한을 둘러싼 논쟁이 지속되어 온 근본적인 원인이다.
4.2 역사적 관행의 변화
헌법에 명시적인 규정이 없기 때문에, 조약 파기 권한의 소재는 역사적 관행과 정치적 역학 관계를 통해 형성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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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역사 (19세기): 미국 건국 초기부터 19세기까지, 조약 파기 권한은 행정부와 입법부가 공유하는 권한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했다. 의회가 법률이나 공동 결의안을 통과시켜 대통령에게 특정 조약의 파기를 지시하거나 승인하는 사례가 다수 존재했다. 예를 들어, 1798년 프랑스와의 조약 파기는 의회가 법률을 제정하고 대통령이 서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16 이 시기에는 대통령이 의회의 명시적 동의 없이 단독으로 조약을 파기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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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후의 변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대통령의 외교 정책상 역할이 비대해지면서 행정부는 점차 의회의 동의 없이 단독으로 조약을 파기하는 권한을 주장하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특히 냉전 시기, 신속하고 단일한 외교적 결정을 내려야 할 필요성이 증대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16
4.3 결정적 판례와 사법부의 태도: 골드워터 대 카터 (1979)
대통령의 단독 조약 파기 권한에 대한 논쟁이 정점에 달한 사건은 1979년의 골드워터 대 카터(Goldwater v. Carter) 소송이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의회와의 협의 없이 대만(중화민국)과의 상호방위조약을 단독으로 파기하자,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을 비롯한 일부 의원들이 이는 헌법상 보장된 의회의 권한을 침해한 위헌적 행위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갔지만, 대법원은 본안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대법원은 이 사안이 사법부가 법적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행정부와 입법부가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정치적 문제(political question)’라는 이유로 소송 자체를 기각했다.16 이 판결은 대통령의 단독 파기 권한을 헌법적으로 인정해 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법부가 대통령의 행동에 제동을 걸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대통령이 단독으로 조약을 파기하는 관행을 사실상 용인하고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
4.4 현대 법 해석과 지배적 견해
골드워터 대 카터 판결 이후, 대통령이 단독으로 조약을 파기할 수 있다는 것이 미국 내 지배적인 견해로 자리 잡았다. 특히 한미 FTA와 같은 대부분의 현대 무역 협정은 상원의 3분의 2 동의가 필요한 ’조약(Article II Treaty)’이 아니라, 상원과 하원 양원의 과반수 찬성으로 이행 법률을 통과시키는 방식의 ‘의회-행정 협정(Congressional-Executive Agreement)’ 형태로 체결된다.
미국 법학계의 다수설과 행정부의 일관된 법 해석에 따르면, 대통령은 이러한 의회-행정 협정을 의회의 추가적인 승인 없이 단독으로 파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15 그 논리는 다음과 같다: 체결 절차가 훨씬 더 엄격한 ’조약’조차 대통령이 단독으로 파기하는 관행이 확립되었는데, 그보다 완화된 절차로 체결된 ’의회-행정 협정’의 파기에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것이다.15 최근 미국 의회 내에서 대통령의 일방적인 조약 탈퇴 권한을 제한하려는 법안이 발의되고 있다는 사실 18 자체가, 역설적으로 현재로서는 대통령에게 그러한 단독 권한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조약 파기는 의회 권한’이라는 주장은 미국 건국 초기의 이상적인 권력 분점 모델이나 헌법의 ‘체결’ 조항에 대한 대칭적 해석에 가깝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행정권의 비대화, 외교 분야에서 대통령의 역할 강화, 그리고 사법부의 정치적 문제 회피 경향 속에서 형성된 ’살아있는 헌법(living constitution)’의 현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대통령의 단독 파기 권한은 헌법 조문에 명시된 권리가 아니라, 200여 년의 역사 속에서 행정부가 적극적으로 쟁취하고, 사법부가 묵인하며, 의회가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한 ’관행적 권력(de facto power)’의 산물인 것이다.
5. 조약 파기의 실제: 절차, 의미, 그리고 파급 효과
5.1 권한과 절차의 분리
앞선 3장에서 ’누가 조약을 파기할 수 있는가’라는 권한의 문제를 다루었다면, 본 장에서는 ’어떻게 조약을 파기하는가’라는 절차의 문제를 다룬다. 이 둘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하는 개념이다. 미국 대통령이 조약을 파기할 실질적인 권한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는 반드시 해당 조약이 규정한 공식적인 절차를 따라야만 법적 효력을 갖는다.
5.2 한미 FTA의 공식 종료 절차
한미 FTA 협정문은 스스로의 생을 마감하는 절차, 즉 종료(Termination) 조항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협정문 제24.5조 ‘발효 및 종료’ 조항은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2. 이 협정은 어느 한 쪽 당사국이 다른 쪽 당사국에 이 협정을 종료하기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서면으로 통보한 날로부터 180일 후에 종료된다.” 22
이 조항은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파기는 반드시 ’서면 통보’라는 공식적인 외교적 행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대통령의 구두 발언이나 트위터 메시지 등은 정치적 의사 표명일 뿐, 법적인 파기 절차의 개시가 아니다. 둘째, 서면 통보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협정이 즉시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180일이라는 유예 기간이 존재한다. 이 기간은 양국 기업과 정부가 협정 종료에 따른 충격을 완화하고 대비할 수 있도록 마련된 완충 장치이다. 따라서 대통령이 ’파기하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협정의 법적 효력이 실제로 소멸하는 것 사이에는 명확한 절차적, 시간적 간극이 존재한다.
5.3 ’위반’과 ’파기’의 법적 및 실질적 차이
이 지점에서 사용자가 ’25% 관세 부과’를 ’FTA 파기’와 동일시한 것이 왜 명백한 법적 오류인지를 명확히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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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반(Violation) 또는 의무 불이행(Non-compliance): 25% 관세를 부과하는 행위는 협정의 특정 조항(관세 철폐 의무)을 이행하지 않는 ‘의무 불이행’ 또는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 이 경우, 협정 자체는 여전히 법적으로 유효한 상태로 남아있다. 상대방인 한국은 한미 FTA에 규정된 분쟁해결절차를 개시하여 시정을 요구하거나23, WTO에 제소할 수 있다. 또한, 피해에 상응하는 수준의 보복 조치(예: 미국산 특정 상품에 대한 관세 인상)를 취할 권리를 가질 수도 있다.10 즉, ’위반’은 협정이라는 규칙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전제로 그 규칙을 어긴 것에 대한 다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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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기(Termination): 반면, 협정을 ’파기’하는 것은 협정이라는 법적 관계, 즉 규칙의 틀 자체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행위이다. 제24.5조에 따른 파기 절차가 완료되면, 관세 혜택뿐만 아니라 서비스, 투자, 지식재산권 보호 등 협정의 모든 조항이 양국 간에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양국 관계는 FTA 이전의 상태, 즉 WTO의 일반 원칙이 적용되는 관계로 돌아간다. 이는 양국 경제에 훨씬 더 광범위하고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근본적인 변화이다.
따라서 ’관세 부과’는 협정의 정신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일 수는 있으나, 협정의 법적 효력을 공식적으로 소멸시키는 ’파기’와는 법적 성격, 절차, 그리고 결과 면에서 완전히 다른 행위이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 트럼프 행정부의 실제 전략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목표는 FTA를 공식적으로 ’파기’함으로써 발생하는 예측 불가능한 경제적, 외교적 비용과 비난을 피하는 것이었다. 공식 파기는 180일간의 불확실성, 동맹 관계의 심각한 훼손, 미국 내 수입업자와 소비자의 피해 등 정치적 부담이 매우 크다. 대신, 그들은 232조 관세 위협을 통해 FTA의 핵심 이익인 ’무관세 혜택’을 인질로 삼았다. 이는 상대방에게 ’FTA는 유지되지만, 당신이 누리던 핵심 혜택은 사라질 수 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제시함으로써, 사실상 ’파기’에 준하는 강력한 압박 효과를 만들어냈다. 상대방은 FTA 전체를 잃지 않기 위해 철강 쿼터 수용과 같은 일부 양보를 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이게 된 것이다.12 결국 이는 ’파기’라는 극단적 선택 대신, ’파기 위협’과 ’핵심 이익의 무력화’라는 수단을 통해 파기의 비용은 지불하지 않으면서 파기 이상의 협상력을 확보하려는 고도의 전략적 행동이었다고 분석할 수 있다.
6. 결론: 종합 분석 및 전망
본 보고서는 세 가지 핵심 주장에 대해 한미 FTA 협정문, 미국 국내법, 그리고 미국 헌법 체계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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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관세는 FTA 위반인가?”: 단순 위반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미국은 자국 국내법인 무역확장법 제232조와 한미 FTA 자체의 예외 조항인 ‘필수안보’ 조항을 근거로 한 ’정당화된 조치’라고 주장한다. 이는 명백한 위반 행위라기보다는, 국제 규범과 국내법 사이에 존재하는 법리적 회색지대를 활용하여 상대방을 압박하고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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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부과는 파기와 동일한가?”: 결코 동일하지 않다. 관세 부과는 협정의 특정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위반’ 행위의 범주에 속하며, 이 경우 협정 자체는 법적으로 존속한다. 반면, ’파기’는 협정문 제24.5조에 명시된 공식 절차(서면 통보 후 180일 경과)를 통해 협정의 ‘법적 효력’ 자체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법적 행위이다. 이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중대한 법적 오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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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파기 권한은 의회에 있는가?”: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다. 미국 헌법은 조약 파기 권한의 주체를 명시하지 않았으나, 20세기 이후 형성된 역사적 관행, 골드워터 대 카터 사건에서 나타난 사법부의 소극적 태도, 그리고 지배적인 법 해석에 따르면, 대통령이 의회의 명시적 동의 없이 단독으로 조약을 파기할 실질적인 권한을 갖는다는 것이 현대 미국의 헌법적 현실이다.
이상의 분석을 종합해 볼 때, 한미 FTA를 둘러싼 일련의 갈등은 조약의 문구 자체에 대한 순수한 법리 논쟁이라기보다는, 강대국의 국내법과 정치적 의지가 국제 규범을 어떻게 무력화하거나 자국에 유리하게 재해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냉정한 사례이다. 이는 국제 통상 질서가 순수한 법의 지배가 아닌, 힘의 논리와 정치적 현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영역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따라서 향후 유사한 통상 압박이 재발할 경우, 우리의 대응 역시 ‘조약 위반’ 여부를 따지는 국제법적 공방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상대국의 국내 정치 지형과 법적 논리를 면밀히 분석하고, 외교적 협상과 전략적 타협을 통해 국익을 실질적으로 확보하는 다차원적인 접근이 필수적임을 본 사례는 명확히 시사하고 있다.
7.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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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ited States–Korea Free Trade Agreement -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United_States%E2%80%93Korea_Free_Trade_Agreement
- 알기 쉬운 한·미FTA, https://www.fta.go.kr/webmodule/_PSD_FTA/us/data/5_know_easy_fta.pdf
- 美 상호관세 시행되면 ’반쪽짜리’로 전락?…한미 FTA 운명은 - 한국무역협회, https://www.kita.net/board/totalTradeNews/totalNewsExistDetail.do?no=90778
- 정부 “한미 FTA 유지“라지만… 트럼프 정부에선 사실상 ‘휴지조각’ - 한국일보,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73113140003696
- 한미 FTA 발효 10년 성과와 시사점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https://www.kiep.go.kr/galleryDownload.es?bid=0003&list_no=9979&seq=1
- 한·미국 FTA 협정문 - FTA 포털, https://www.customs.go.kr/ftaportalkor/cm/cntnts/cntntsView.do?mi=3314&cntntsId=2412
- 미국 무역확장법 제232조 조치는 GATT/WTO 규정에 … - KoreaScience, https://koreascience.kr/article/JAKO20191805296732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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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무역확장법 232조에 대한 주요국의 대응 현황, https://www.kiep.go.kr/galleryDownload.es?bid=0005&list_no=3585&seq=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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