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 이전 AI 및 로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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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현대 기술의 고대적 기원

’인공지능(AI)’과 ’로봇’이라는 현대적 용어가 정립되기 훨씬 이전부터, 인류는 인간의 지능과 행동을 기계적으로 모방하거나 그 능력을 확장하려는 열망을 품어왔다. 이러한 열망은 고대부터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크게 세 가지의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연관된 흐름 속에서 구체화되었다. 첫째는 생명의 움직임을 기계로 재현하려 한 자동기계(Automata)의 흐름, 둘째는 인간의 정신 활동인 계산을 자동화하려 한 기계식 계산(Mechanical Computation)의 흐름, 그리고 마지막은 사유와 추론의 과정을 엄밀한 기호 체계로 형식화하려 한 형식 논리(Formal Logic)의 흐름이다.

본 보고서는 이 세 가지 흐름이 고대 문명의 여명기부터 산업혁명 시대를 거치며 어떻게 각자의 계보를 형성하고 발전했는지, 그리고 19세기 말에 이르러 어떻게 상호 융합의 가능성을 잉태하며 20세기 기술 혁명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는지를 심층적으로 추적하고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인공지능과 로봇 공학의 탄생은 20세기의 단일한 발명이나 발견의 산물이 아니다. 이는 수천 년에 걸쳐 병렬적으로 발전해 온 기계공학, 수학, 그리고 논리학이 19세기라는 지적 용광로 속에서 개념적으로 조우하며 나타난 필연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1900년 이전의 역사를 탐색하는 것은 현대 AI와 로봇 기술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지적 여정이다.

2. 생명의 모방 - 자동기계(오토마타)의 계보

자동기계, 즉 오토마타의 역사는 인간과 동물의 외형적 움직임을 넘어 생명 현상 그 자체를 기계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던 인류의 오랜 꿈을 담고 있다. 이는 초기 로봇 공학의 기계적 상상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당대의 기술적 한계와 철학적 세계관이 어떻게 그 형태를 규정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연대기이다.

2.1 신화와 현실의 경계: 고대 문명의 자동 장치

오토마타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1 이 시대의 자동 장치들은 신화적 상상력과 초기 기계공학이 결합된 형태를 띤다. 특히 헬레니즘 문명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발명가 헤론(Heron of Alexandria)은 증기와 수력을 동력원으로 하는 다양한 기계 장치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2 그의 발명품 중 증기력을 이용해 공을 회전시키는 ’아에올리스의 공(Aeolipile)’은 최초의 증기기관으로 평가받으며, 이는 자연의 힘을 기계적 운동 에너지로 변환하는 원리를 체계적으로 활용한 사례다.2 또한, 동전을 투입하면 정해진 양의 성수가 나오는 장치는 입력(동전)에 따라 정해진 출력(성수)을 내보내는 기본적인 제어 개념을 포함하고 있어, 단순한 기계 장난감을 넘어선 공학적 의미를 지닌다.2

이러한 시도는 동양에서도 발견된다. 기원전 3세기경 중국의 문헌 『열자(列子)』에는 장인 ’언사(偃師)’가 주무왕에게 살아있는 듯 정교하게 움직이는 등신대의 인형 ’창우(倡優)’를 선보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2 이는 생명을 기계적으로 모방하려는 열망이 특정 문명에 국한되지 않은 보편적인 관심사였음을 시사한다.

고대의 자동 장치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1900년에 발굴된 ’안티키티라 기계(Antikythera Mechanism)’이다.2 기원전 1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장치는 17세기 정밀 기계에 필적하는 복잡한 기어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태양, 달, 행성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자동 행성 계산기, 즉 일종의 기계식 천문 시계였다.3 안티키티라 기계는 헤론의 장치들이 주로 외형적 움직임을 모방한 것과 달리, 천체의 운행이라는 추상적인 자연법칙을 기계적으로 ’모델링’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여기서 고대 오토마타의 발전이 초기부터 두 가지 뚜렷한 목적으로 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헤론이 설계한 자동으로 열리는 신전 문이나 성수 자판기와 같이 종교적 의식에 사용되어 신비로움과 경외감을 증폭시키는 ’신성(神性)의 구현’이라는 흐름이 하나다.2 다른 하나는 안티키티라 기계처럼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예측하려는 과학적 도구로서의 ’자연의 이해’라는 흐름이다.3 이 두 가지 목적성, 즉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예술적 목적과 자연의 원리를 탐구하는 기능적 목적은 훗날 엔터테인먼트 로봇과 산업용 로봇의 계보로 이어지는 원형적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2.2 이슬람 황금기의 기계공학: 알 자자리의 혁신

중세 시대, 특히 이슬람 황금기는 과학 기술이 크게 발전한 시기였다.2 12세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활동한 위대한 공학자 알 자자리(Al-Jazari)는 오토마타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1206년에 저술한 『독창적인 기계 장치에 대한 지식의 책(The Book of Knowledge of Ingenious Mechanical Devices)』을 통해 자신이 설계하고 제작한 100여 종의 자동 기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남겼다.2

알 자자리의 가장 큰 공헌은 현대 기계공학의 핵심 부품인 **캠축(Cam Shaft)**과 **크랭크축(Crankshaft)**을 체계적으로 발명하고 활용한 점에 있다.2 크랭크축은 연속적인 회전 운동을 직선 왕복 운동으로 변환하는 핵심 메커니즘으로, 훗날 증기기관과 내연기관의 근간이 되는 기술이다.2 알 자자리는 이 기술들을 음료 시중을 드는 자동 인형, 자동으로 여닫히는 문, 물을 끌어올리는 펌프 등 다양한 장치에 적용했다.2

특히 그의 ’자동 인형 악단’은 주목할 만하다. 이 장치는 물의 흐름을 이용해 수차를 돌리고, 이 회전력이 캠축과 레버 시스템을 통해 여러 인형들을 움직여 북과 심벌즈 등을 연주하게 하는 구조였다. 중요한 점은 캠의 위치나 모양을 조절함으로써 인형들의 연주 패턴, 즉 음악을 변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기계의 물리적 구조(하드웨어)를 통해 저장된 정보(소프트웨어)를 변경하는, 프로그래밍 가능한 기계의 원시적 형태로 해석될 수 있다. 알 자자리의 작업은 고대의 단순한 반복 동작을 넘어, 복잡하고 가변적인 동작을 구현하는 정교한 기계공학의 시대를 열었음을 보여준다.

2.3 유럽의 기계적 경이: 다빈치에서 보캉송까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오토마타는 인간에 대한 깊은 탐구와 결합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체 해부학에 대한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기계 기사(Mechanical Knight)’**를 설계했다. 이 설계도는 도르래와 케이블 시스템을 통해 기사의 팔다리를 움직이고, 턱을 열고 닫으며, 앉고 일어설 수 있도록 고안됐다. 비록 실제 제작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는 인간의 골격과 근육의 움직임을 기계적으로 재현하려는 최초의 과학적 시도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8세기는 유럽 오토마타의 황금기였다. 시계 제작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자동 인형들이 제작되었다. 이 시기의 정점은 프랑스의 발명가 **자크 드 보캉송(Jacques de Vaucanson)**이 1738년에 공개한 **‘소화하는 오리(The Digesting Duck)’**였다. 이 기계 오리는 400개가 넘는 부품으로 이루어져 날개를 펄럭이고, 물을 마시며, 심지어 곡식을 먹고 소화시켜 배설하는 과정까지 생생하게 모방했다.

보캉송의 오리는 기술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그는 오리의 소화 과정을 모방하기 위해 세계 최초로 유연한 고무 튜브를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실제 소화 과정은 아니었고, 미리 저장된 곡물과 배설물을 교묘하게 처리하는 일종의 ’속임수’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오토마타의 모방 대상이 단순히 외형적 움직임에서 생명체의 내부적 **‘과정(process)’**으로 심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고대의 오토마타가 걷거나 손을 흔드는 겉모습을 따라 하는 데 그쳤다면, 보캉송의 오리는 소화와 배설이라는 생물학적 메커니즘 자체를 분석하고 이를 기계적으로 시뮬레이션하려 했다. 이러한 ’과정의 시뮬레이션’이라는 개념은 훗날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고 과정’을 시뮬레이션하려는 시도와 그 맥을 같이 한다.

또한, 보캉송의 또 다른 구상인 ’글씨 쓰는 인형’에 대한 이야기는 당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인형이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쓸 수 있었다는 일화가 널리 퍼진 것 자체가, 생명과 사유마저 복잡한 기계 장치로 이해하려 했던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2.4 동아시아의 정교함: 자격루와 가라쿠리 인형

동아시아에서도 독자적인 오토마타 기술이 발전했다. 조선 세종 시대인 15세기에 장영실이 제작한 자격루(옥루)는 정교한 자동 시보 장치를 갖춘 물시계였다.2 이 장치는 단순히 시간을 측정하는 것을 넘어, 정해진 시간이 되면 인형이 나타나 종이나 북을 쳐서 시간을 알려주는 복잡한 연동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추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구체적인 기계적 움직임과 정확하게 결합시킨 뛰어난 기술적 성취였다.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17~19세기)에 ’가라쿠리 인형(からくり人形)’이라는 독특한 오토마타 문화가 발달했다. 태엽 장치를 동력으로 하는 이 인형들은 차를 나르거나, 활을 쏘거나, 글씨를 쓰는 등 특정 임무를 수행하도록 정교하게 제작되었다.2 특히 ’차 나르는 인형’은 손님이 찻잔을 들면 앞으로 나아가 차를 대접하고, 빈 찻잔을 다시 그릇에 올려놓으면 뒤로 돌아오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찻잔의 유무라는 외부 환경의 변화를 감지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행동 패턴을 바꾸는, 일종의 간단한 상호작용 기능을 구현한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주어진 명령을 수동적으로 반복하는 것을 넘어,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자율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현대 로봇의 개념적 선구로 평가할 수 있다.

3. 계산의 기계화 - 현대 컴퓨터의 기계적 선구자

인간의 정신 활동 중 가장 논리적이고 형식적인 영역인 ’계산’을 기계에 맡기려는 시도는 인공지능의 또 다른 핵심 줄기를 형성한다. 오토마타가 인간의 물리적 행동을 모방했다면, 기계식 계산기는 인간의 논리적 사고 과정을 기계화하려는 시도였다. 이 흐름은 19세기에 이르러 현대 컴퓨터의 기본 구조와 프로그래밍 개념을 설계하는 놀라운 성취를 이룩했다.

3.1 최초의 기계식 두뇌: 파스칼과 라이프니츠의 계산기

계산 자동화의 역사는 17세기 두 천재 수학자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642년, 프랑스의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톱니바퀴의 회전을 이용해 덧셈과 뺄셈을 수행하는 기계식 계산기 ’파스칼린(Pascaline)’을 발명했다.7 세금 계산 업무를 하던 아버지를 돕기 위해 개발된 이 기계는, 뺄셈을 보수(complement)를 이용한 덧셈으로 처리하는 등 효율적인 계산 원리를 적용했다.7 파스칼린은 최초로 상업적으로 제작된 기계식 계산기로, 계산 자동화가 실용적 필요에서 출발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발명품이다.9

1671년, 독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는 파스칼린을 한 단계 발전시켜 곱셈과 나눗셈까지 가능한 사칙연산 기계를 고안했다.9 그의 ’계단식 계산기(Stepped Reckoner)’는 곱셈을 덧셈의 반복으로, 나눗셈을 뺄셈의 반복으로 수행하는 원리를 채택했다. 이를 효율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그는 ‘계단식 원통(Stepped Drum)’ 또는 ’라이프니츠 휠’이라는 혁신적인 부품을 발명했다.7 이 장치는 기계식 계산기의 기본 구조를 완성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이후 약 200년간 기계식 계산기 설계의 표준이 되었다.7

라이프니츠의 기여는 기계 발명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는 계산기 개발과 별개로, 1과 0 두 개의 숫자만으로 모든 수를 표현하는 이진법(Binary System)을 철학적, 수학적으로 체계화했다.10 라이프니츠는 이진법이 기계 장치의 작동 원리에 더 적합할 수 있다는 통찰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 그의 기계식 계산기와 이진법 연구가 직접적으로 결합되지는 않았지만, 한 인물의 지적 활동 안에서 ’계산의 물리적 구현(기계)’과 ’정보의 상징적 표현(이진법)’이라는 두 가지 핵심 아이디어가 동시에 탐구되고 있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20세기 중반, 클로드 섀넌이 부울 대수(상징)를 전기 회로(물리)에 적용하여 현대 디지털 컴퓨터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기까지 약 250년의 시간을 앞서간 선구적인 통찰이었다. 라이프니츠는 그 위대한 융합의 가능성을 무의식적으로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3.2 찰스 배비지의 위대한 설계: 차분기관과 해석기관

19세기에 이르러 계산 기계의 개념은 영국의 수학자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에 의해 혁명적인 도약을 이룬다. 그의 첫 번째 발명은 1822년에 설계된 ’차분기관(Difference Engine)’이었다.9 이는 항해와 공학에 필수적인 로그 및 삼각함수 표를 자동으로 계산하고 인쇄하기 위해 고안된 특수 목적 계산기였다.11 당시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던 함수표는 오류가 많았기 때문에, 이를 기계화하여 정확성을 높이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차분기관은 유한차분법(method of finite differences)이라는 수학 원리를 이용하여, 복잡한 다항함수 계산을 오직 덧셈의 연쇄적인 반복만으로 수행하도록 설계되었다.12

차분기관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배비지는 훨씬 더 원대한 구상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으로, 1837년에 처음 설계가 발표된 이 기계는 역사상 최초의 ‘프로그램 가능한’ 범용 컴퓨터 개념이었다.11 해석기관의 설계는 시대를 100년 이상 앞서간 놀라운 통찰을 담고 있었다.

첫째, 해석기관은 현대 컴퓨터의 폰 노이만 구조를 예견한 핵심적인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숫자를 저장하는 ’저장소(Store)’는 오늘날의 메모리(RAM)에 해당하고, 저장된 숫자를 가져와 사칙연산을 수행하는 ’공장(Mill)’은 중앙처리장치(CPU)의 산술논리장치(ALU)에 해당한다.14 데이터를 저장하는 부분과 데이터를 처리하는 부분을 물리적으로 분리한 이 설계는 복잡한 계산을 순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혁신적인 발상이었다.

둘째, 해석기관은 프랑스의 조제프 마리 자카드(Joseph Marie Jacquard)가 발명한 자동 직기에서 사용되던 천공 카드(punched card)를 이용해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외부에서 입력받도록 설계되었다.11 이는 기계가 단 하나의 고정된 기능에 얽매이지 않고, 천공 카드만 교체하면 어떤 종류의 계산이든 수행할 수 있는 범용성(universality)을 갖게 됨을 의미했다.

이러한 해석기관의 잠재력을 가장 깊이 이해한 인물은 시인 바이런의 딸이자 수학자였던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였다. 그녀는 해석기관에 대한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며 방대한 주석을 달았는데, 이 주석에서 기계가 단순히 숫자 계산을 넘어 논리적 기호를 처리하여 음악을 작곡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창의적인 작업까지 수행할 수 있다는 놀라운 가능성을 통찰했다.16 또한 그녀는 해석기관이 베르누이 수를 계산하는 일련의 절차를 구체적인 단계로 기술했는데, 이는 역사상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램, 즉 알고리즘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배비지의 위대한 설계는 끝내 현실이 되지 못했다. 해석기관은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하는, 길이가 3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기계 장치로 구상되었으나 11, 당시의 정밀 가공 기술로는 수만 개의 부품을 제작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막대한 개발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정부의 지원마저 끊기고 말았다.13

이처럼 배비지의 프로젝트는 당대의 기준으로 명백한 ’실패’였다. 하지만 이 실패는 기술적, 재정적 한계에 부딪힌 물리적 실패였을 뿐, 개념의 실패가 아니었다. 그의 설계도에는 현대 컴퓨터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메모리와 CPU의 분리, 저장된 프로그램 개념, 조건 분기, 루프, 범용성—이 모두 담겨 있었다. 이 ‘실패한’ 설계도는 100년 후 앨런 튜링과 존 폰 노이만 같은 컴퓨터 과학의 선구자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며 디지털 컴퓨터 시대의 청사진 역할을 했다. 따라서 배비지의 작업은 물리적 실패를 통해 시대를 초월한 개념적 성공을 거둔 사례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이는 기술의 발전이 항상 선형적인 성공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아이디어가 잠자고 있다가 후대에 재발견되어 비로소 구현되는 비선형적 과정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교훈이다.

항목파스칼 계산기 (Pascaline)라이프니츠 계산기차분기관 (Difference Engine)해석기관 (Analytical Engine)
개발자/시기블레즈 파스칼 (1642)G. W. 라이프니츠 (1671)찰스 배비지 (1822 설계)찰스 배비지 (1837 설계)
주요 기능덧셈, 뺄셈 (보수 이용)사칙연산 (덧셈/뺄셈 반복)다항함수 계산 (유한차분법)범용 계산 (프로그래밍 가능)
핵심 기술톱니바퀴, 자리올림 장치계단식 원통(Stepped Drum)연쇄적 덧셈 기어 구조저장소(Store), 공장(Mill), 천공 카드
동력원수동수동수동 (설계상 증기기관 고려)증기기관 (설계)
기술사적 의의최초의 상용 기계식 계산기사칙연산 기계화의 완성자동 계산의 가능성 제시현대 컴퓨터의 기본 구조 최초 고안

4. 사유의 형식화 - 인공지능의 논리적 초석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계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인간의 ’생각’과 ‘추론’ 과정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오토마타가 기계의 ’몸’을, 기계식 계산기가 ’뇌’의 일부를 만들었다면, 형식 논리는 그 뇌가 사용할 ’언어’와 ’문법’을 제공했다. 이는 인공지능의 가장 근본적인 지적 토대를 마련한 작업이었다.

4.1 추론의 규칙: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

인간의 추론 과정을 최초로 체계화하고 형식화한 인물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였다. 그는 ’삼단논법(Syllogism)’이라는 연역적 추론 형식을 정립했다.19 삼단논법은 두 개의 전제로부터 필연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논증 구조다.19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다음과 같다.21

  • 대전제: 모든 사람은 죽는다.
  • 소전제: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 결론: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논증이 타당하기 위한 여러 규칙들을 분석하고, 대전제, 소전제, 결론에 사용되는 개념들(대개념, 소개념, 매개념)의 관계를 체계화했다.19 삼단논법의 가장 큰 의의는 인간의 이성적 사유가 임의적이거나 신비로운 과정이 아니라, 명확한 ’규칙’에 따라 작동하며 분석될 수 있음을 최초로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이는 ’생각의 과정’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형식화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의 출발점이었으며, 이후 2천 년 이상 서양 논리학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은 “A는 B이다“와 같은 단순한 범주적 명제에만 국한되어, 복잡한 관계나 다중 조건을 포함하는 추론을 다루기에는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21

4.2 논리의 대수학: 조지 불의 ‘사고의 법칙’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논리학의 가장 큰 혁신은 19세기 중반 영국의 수학자 조지 불(George Boole)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1847년과 1854년의 저서를 통해 논리학을 수학, 특히 대수학의 한 분야로 다루는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다.24

불의 핵심 개념은 논리적 명제가 가질 수 있는 값은 ’참(True)’과 ‘거짓(False)’ 단 두 가지뿐이며, 이를 각각 숫자 1과 0에 대응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25 그리고 그는 논리적 연결사인 ‘그리고(AND)’, ‘또는(OR)’, ‘아니다(NOT)’를 각각 대수학의 연산인 곱셈(*), 덧셈(+), 그리고 보수(’) 연산으로 정의했다.26 예를 들어, “A 그리고 B“라는 명제는 A \cdot B로 표현되며, A와 B가 모두 참(1)일 때만 결과가 참(1)이 된다. 이는 대수학의 곱셈 규칙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러한 체계를 ‘부울 대수(Boolean Algebra)’라고 부른다. 부울 대수를 통해 복잡한 논리적 추론은 간단한 대수식의 조작과 계산으로 변환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드모르간의 법칙 $ (A+B)’ = A’ \cdot B’ $ 와 같은 공식들은 논리적 관계를 수학적으로 증명하고, 복잡한 논리식을 간소화하는 강력한 도구를 제공했다.28

조지 불의 작업이 갖는 의미는 실로 심대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추론에 ’규칙’이 있음을 보였다면, 불은 그 규칙이 ’계산 가능(computable)’함을 증명한 것이다. 명제를 0과 1이라는 숫자로 치환하고, 논리적 연결을 대수 연산으로 바꾼 순간, 인간의 추상적인 사유 과정은 기계가 수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산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생각하는 기계’라는 개념은 불의 작업을 통해 더 이상 형이상학적 공상의 대상이 아니라, 공학적 가능성의 문제로 전환되었다. 이것이 바로 현대 컴퓨터 과학과 인공지능의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토대이다.

4.3 현대 논리학의 여명: 고틀로프 프레게의 ‘개념표기법’

1879년, 독일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고틀로프 프레게(Gottlob Frege)는 얇지만 지성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저서 『개념표기법(Begriffsschrift)』을 출판했다.30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2천 년 만에 논리학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꾼 혁명적인 작업으로 평가받는다.33

프레게는 기존 명제 논리가 문장 내부의 구조를 분석하지 못하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문장을 수학의 ’함수(Function)’와 ‘논항(Argument)’ 개념으로 분석하는 ’술어 논리(Predicate Logic)’를 창안했다.33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라는 문장을 그는 사람(소크라테스)와 같이 표현했다. 여기서 ’사람이다’는 빈칸을 가진 함수 $ \text{사람}(x) $이고, ’소크라테스’는 그 빈칸을 채우는 논항이다. 이 방식을 통해 문장의 주어와 술어 관계를 명확히 하고, 대상과 그 대상의 속성을 엄밀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프레게의 가장 독창적이고 중요한 기여는 “모든(for all)“과 “어떤(there exists)“이라는 개념을 형식화한 ’양화사(Quantifier)’를 도입한 것이다.31 그는 ’모든’을 나타내는 보편 양화사(현대 기호 ∀)와 ‘어떤’(존재한다)을 나타내는 존재 양화사(현대 기호 ∃)를 사용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로는 다룰 수 없었던 복잡한 문장들을 정확하게 표현했다.33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다음과 같이 형식화될 수 있다.
\forall x (\text{사람}(x) \rightarrow \text{죽는다}(x))
이는 “모든 대상 x에 대하여, 만약 x가 사람이라면, x는 죽는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술어 논리와 양화사의 도입은 자연 언어의 모호함을 제거하고, 수학적 증명처럼 엄밀하고 명료한 ’순수 사유의 공식 언어’를 만들어냈다.30

프레게의 개념표기법은 현대 수리논리학과 분석철학의 직접적인 출발점이 되었다.33 더 나아가, 그의 논리 체계는 20세기 컴퓨터 과학, 특히 인공지능 분야에 결정적인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오늘날 AI 시스템에서 지식을 표현하고(Knowledge Representation), 주어진 사실로부터 새로운 사실을 논리적으로 추론하는(Inference) 모든 과정은 본질적으로 프레게가 창안한 1차 술어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33

5. 결론: 융합의 서막 - 19세기의 유산과 20세기의 전망

19세기 말이 저물어갈 무렵, 인공지능과 로봇 공학이라는 미래 기술을 탄생시키는 데 필요한 세 가지 핵심적인 개념적 요소가 모두 마련되었다. 수천 년에 걸쳐 각기 다른 경로를 따라 발전해 온 세 개의 지적 흐름이 마침내 하나의 지평선에서 만날 준비를 마친 것이다.

첫째, 기계(Hardware)의 유산이다. 고대부터 이어진 오토마타의 역사는 자크 드 보캉송의 정교한 인형과 일본의 가라쿠리에 이르러, 복잡하고 정교한 기계 장치를 통해 물리적인 작업을 수행하고 심지어 외부 환경과 간단히 상호작용할 수 있는 기술적 가능성을 입증했다. 이는 지능을 담을 수 있는 물리적 ’몸체’의 원형을 제시한 셈이다.

둘째, 계산(Computation)의 유산이다. 찰스 배비지의 해석기관은 비록 당대에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 설계도 안에 현대 컴퓨터의 핵심 구조를 모두 담고 있었다. 저장소와 연산 장치의 분리, 외부에서 프로그램을 입력받는 방식, 그리고 범용 계산 능력이라는 개념은 ’생각하는 기계’의 ’뇌’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완벽한 청사진이었다.

셋째, 논리(Logic/Software)의 유산이다. 조지 불은 인간의 사유와 추론이 계산 가능한 대수적 체계임을 증명했고, 고틀로프 프레게는 술어 논리와 양화사를 통해 인간의 지식과 언어를 기계가 다룰 수 있는 엄밀한 형식 언어로 변환하는 방법론을 완성했다. 이는 기계의 ’뇌’에 탑재될 ‘정신’, 즉 소프트웨어의 근본 원리를 제공했다.

19세기의 유산은 이 세 가지 요소의 개념적 조우 그 자체였다. 배비지의 기계는 불과 프레게의 논리를 실행할 수 있는 완벽한 ’몸체’였고, 불과 프레게의 논리는 배비지의 기계에 ’정신’을 불어넣을 수 있는 완벽한 ’언어’였다. 비록 당대의 기술적, 사회적 한계로 인해 이 위대한 융합이 물리적으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19세기는 그 융합을 위한 모든 지적, 개념적 준비를 마친 시대였다.

이 풍부한 유산은 20세기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앨런 튜링이 ’튜링 기계’라는 추상적 모델을 통해 계산 가능한 모든 것의 이론적 한계를 정의하고, 클로드 섀넌이 부울 대수를 전기 스위칭 회로에 적용하여 논리와 전자를 결합했으며, 존 폰 노이만이 배비지의 아이디어를 계승하여 실제 작동하는 디지털 컴퓨터를 만들어내면서 마침내 융합은 현실이 되었다. 1900년 이전의 선구자들은 ’생각하는 기계’라는 거대한 성당의 설계도를 그리고 그 주춧돌을 놓았다. 20세기는 그 위대한 설계도 위에 인류 문명의 지형을 바꿀 실제 성당을 건축한 시대였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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