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니체리 - 오스만 제국의 창조자이자 파괴자
1. 서론
오스만 제국의 500년 역사는 예니체리(오스만 튀르크어: يڭيچرى, yeniçeri)라는 이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새로운 군대’라는 뜻을 지닌 이 집단은 14세기에 창설되어 19세기 초 해체될 때까지 제국의 흥망성쇠 중심에 서 있었다.1 술탄의 절대 권력을 뒷받침하는 최정예 친위대이자 제국 팽창의 선봉에 섰던 공포의 군단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스스로가 권력의 화신이 되어 술탄을 시해하고 국정을 농단하는 제국의 암적 존재로 변모했다.
예니체리의 역사는 단순한 군사사가 아니다. 그것은 독특한 인재 등용 시스템이었던 데브시르메(Devşirme) 제도를 통해 어떻게 피지배 계층의 소년들이 제국의 최상위 엘리트가 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회사이며, 절대 권력이 어떻게 부패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정치사이기도 하다. 그들은 화약 시대의 도래를 이끈 군사 혁신의 선구자였고, 동시에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며 제국의 근대화를 가로막은 가장 완고한 수구 집단이었다.
본 보고서는 예니체리의 탄생 배경과 과정, 그들의 조직과 전술, 그리고 전성기의 영광을 심도 있게 분석한다. 나아가, 이 막강했던 군단이 어떻게 부패하여 권력 집단으로 변질되었으며, 마침내 ’상서로운 사건(Vaka-i Hayriye)’이라 불리는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그 전 과정을 추적한다. 이를 통해 예니체리가 오스만 제국의 역사 속에서 차지했던 양면적 위상, 즉 제국의 가장 강력한 창이자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던 역설을 종합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2. 주요 연표
| 시기 / 연도 | 주요 사건 | 내용 | 역사적 의의 |
|---|---|---|---|
| 약 1360년대 | 예니체리 창설 | 술탄 무라트 1세(혹은 오르한 1세)가 전쟁 포로를 중심으로 술탄 직속 상비 보병부대 창설. 2 | 투르크 유목 기병 중심의 군사 체계 한계를 극복하고, 술탄의 중앙 권력을 강화하는 기반 마련. |
| 1385년 / 1395년 | 데브시르메 제도 공식 기록 등장 | 발칸 반도의 기독교 소년을 강제 징집하여 군인 및 관료로 양성하는 제도가 공식화됨. 6 | 예니체리의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충원 시스템 확립. 제국의 핵심 엘리트 양성 제도로 발전. |
| 1440년대 | 머스킷 제식 채용 | 유럽 군대보다 앞서 머스킷 화승총을 부대의 주력 무기로 채택하고 운용 시작. 9 | 화약 시대의 선구자로서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보병의 전략적 가치를 극대화. |
| 1453년 | 콘스탄티노플 함락 | 술탄 메흐메트 2세 지휘 하에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에서 결정적인 돌파 역할 수행. 4 | 예니체리의 전투력과 규율을 세계에 과시. 오스만 제국이 세계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상징적 사건. |
| 1526년 | 모하치 전투 | 술탄 쉴레이만 1세 휘하에서 헝가리 왕국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둠. 12 | 정교한 화력 전술로 유럽의 중기병을 격파. 중부 유럽으로의 제국 팽창을 가속화. |
| 1568년 | 충원 규정 완화 (1차) | 퇴역 예니체리의 아들들이 군단에 입대하는 것을 허용. 2 | ’술탄의 노예’라는 비세습 원칙이 흔들리기 시작. 군단의 순수성과 정체성 변화의 시초. |
| 1594년 | 충원 규정 완화 (2차) | 모든 자유민 무슬림의 입대를 허용. 2 | 데브시르메 제도의 근간이 무너지고, 예니체리가 특권적 이권 집단으로 변모하는 계기. |
| 1622년 | 오스만 2세 시해 | 예니체리 개혁을 시도하던 술탄 오스만 2세를 폐위하고 살해. 3 | 술탄의 권위를 넘어서는 최초의 극단적 정치 개입. 예니체리가 통제 불능의 권력 집단임을 증명. |
| 1637년 / 1703년 | 데브시르메 제도 공식 폐지 | 기독교 소년 징집 제도가 점차 유명무실해지다 공식적으로 폐지됨. 4 | 예니체리가 완전한 세습적, 터키인 중심의 군사 카르텔로 고착화됨. |
| 1807년 | 셀림 3세 폐위 | 신식 군대 ’니자므 제디드’를 창설하여 개혁을 추진하던 술탄 셀림 3세를 반란으로 폐위. 3 | 제국의 근대화 개혁에 대한 예니체리의 조직적 저항이 성공. 제국 쇠퇴를 심화시킴. |
| 1826년 6월 | ‘상서로운 사건’ (Vaka-i Hayriye) | 마흐무트 2세가 신식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킨 예니체리를 학살하고 군단을 해체. 4 | 약 500년간 지속된 예니체리의 역사가 종결. 오스만 제국의 본격적인 근대화 개혁(탄지마트)의 시작. |
3. ’새로운 군대’의 탄생
3.1 유목 제국의 군사적·정치적 딜레마
오스만 제국의 초기 군사력은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전통을 계승한 투르크계 기마 전사들에 의존했다. 이들은 광활한 평원에서 벌어지는 야전에는 능했으나,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공략하는 공성전에는 약점을 드러냈다.4 또한, 이들은 상시 대기하는 정규군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소집되는 부족 연합체에 가까웠기 때문에, 술탄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동원하기 어려웠고 장기적인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4
이러한 군사적 한계는 심각한 정치적 딜레마와 맞물려 있었다. 제국의 성립과 팽창에 기여한 투르크계 부족장, 즉 ’가지(Gazi)’들은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며 술탄의 중앙 권력에 잠재적인 위협이 되었다.5 이들의 충성심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세습적으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경향은 술탄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 구축에 큰 걸림돌이었다.5 따라서 오스만 제국의 초기 술탄들은 두 가지 시급한 과제에 직면했다. 첫째는 공성전과 같은 현대적 전쟁에 능숙한 상비 보병 군단을 확보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기존의 투르크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오직 술탄에게만 충성하는 새로운 엘리트 집단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대한 해답이 바로 예니체리의 창설이었다. 무라트 1세(일부 학자는 오르한 1세 시기로 보기도 함)에 의해 창설된 예니체리는 술탄에게 급료를 받는 전문적인 상비군이자 ‘카프쿨루(Kapıkulu)’, 즉 ‘궁정의 노예’ 신분으로서 술탄 개인에게 절대적으로 종속된 집단이었다.5 이들은 투르크 귀족들과는 다른 출신 배경과 정체성을 가짐으로써, 술탄이 기존의 권력 구조를 우회하여 직접적인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당대 유럽의 군사 체계가 봉건제에 기반하여 토지와 작위를 매개로 한 귀족 중심의 분권적 권력 구조를 특징으로 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오스만 제국은 예니체리라는 독특한 제도를 통해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는 예니체리가 단순한 신식 군대를 넘어, 기존의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술탄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구축하는 핵심적인 정치적 장치였음을 의미한다.
3.2 데브시르메 제도의 확립: 술탄의 ‘가족’ 만들기
예니체리 군단의 안정적인 병력 충원을 위해 고안된 제도가 바로 ’데브시르메(Devşirme)’였다. ‘징집’ 또는 ’수집’을 의미하는 이 제도는 초기 전쟁 포로의 1/5을 술탄이 차지하던 ‘펜직(Pençik)’ 제도에서 발전한 것으로, 제국 내 발칸 반도와 같은 정복지의 기독교 가정에서 8세에서 20세 사이의 남자아이들을 강제로 징발하는 시스템이었다.4 그리스어로는 ’아이 모으기’라는 뜻의 ’페도마조마(Παιδομάζομα)’로 불리며 피지배 민족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5
데브시르메로 징집된 소년들은 가족과 고향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채 수도 이스탄불로 보내졌다. 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터키어를 배우며 오스만 문화와 관습을 체득하는 철저한 교육 과정을 거쳤다.2 이 과정은 단순한 군사 훈련을 넘어, 그들의 기존 정체성을 지우고 오직 술탄을 ’아버지’로, 군단 동료들을 ’형제’로 여기는 새로운 정체성을 주입하는 세뇌에 가까웠다.9 이들은 법적으로 ‘술탄의 노예’ 신분이었지만, 이는 오히려 세속적인 혈연이나 지연에서 자유로운, 술탄에게만 충성하는 엘리트 집단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다.16
데브시르메 제도는 단순히 예니체리만을 충원하는 군사적 목적에 국한되지 않았다. 징집된 소년들은 자질과 능력에 따라 엄격하게 분류되었다. 가장 재능이 뛰어난 이들은 궁정 학교인 ’엔데룬(Enderûn)’에서 교육받아 제국의 최고위 관료나 재상(Vezir-i Azam)으로 성장했으며,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이들은 예니체리나 다른 카프쿨루 부대의 장교가 되었다.9 예술이나 기술에 재능을 보인 이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 육성되었다.20 이처럼 데브시르메는 능력주의에 기반한 파격적인 인재 등용 시스템으로서, 피지배 민족의 소년에게 제국 최상층부로 신분이 상승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 제도는 피정복민들에게 ‘인간 세금’ 또는 ’피의 세금’으로 불리며 극심한 반발을 샀다. 자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뇌물을 주거나 조혼을 시키는 등 다양한 저항이 있었으며, 때로는 반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16 그러나 한편으로는, 특히 보스니아와 알바니아 일부 지역에서는 가난한 농민 가정이 자식의 출세를 위해 자발적으로 데브시르메에 응하거나 뇌물을 바치는 역설적인 상황도 발생했다.16 이는 데브시르메 제도가 지닌 억압과 기회라는 양면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3.3 정체성의 주조: 벡타쉬 신비주의와 ‘솥’ 공동체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된 예니체리들에게 새로운 소속감과 정체성을 부여한 것은 엄격한 군율과 독특한 공동체 문화였다. 창설 초기부터 예니체리들은 결혼과 상업 활동이 금지되었다.9 이는 그들이 세속적인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군인으로서의 삶과 술탄에 대한 충성에만 전념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들의 삶은 병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부대원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가족처럼 유대감을 형성했다.
이러한 공동체 의식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는 ’솥(kazan)’이었다. 모든 부대원이 같은 솥에서 끓인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그들이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한솥밥 식구’임을 의미했다.9 술탄이 하사하는 음식을 먹는 것은 충성의 표현이었으며, 반대로 솥을 뒤엎는 행위는 술탄의 명령에 대한 집단적 항명, 즉 반란의 시작을 알리는 가장 강력한 상징적 행위였다.9
정신적 측면에서 예니체리의 정체성을 지탱한 것은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인 벡타쉬 교단(Bektashi Order)이었다. 예니체리 군단은 창설 초기부터 벡타쉬 교단과 깊은 관계를 맺었으며, 벡타쉬 교단의 지도자는 예니체리의 정신적 스승으로 여겨졌다.27 정통 수니파 이슬람과 달리 기독교 등 다른 종교의 요소를 포용하는 혼합주의적이고 관용적인 성격의 벡타쉬 신앙은 기독교 출신인 예니체리 병사들이 이슬람 세계에 적응하는 데 있어 완충 작용을 했다.25 이러한 독특한 종교적 배경은 예니체리를 오스만 사회의 다른 집단, 특히 정통 수니파 율법학자 계층인 울레마(Ulema)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진 집단으로 만들었다. 이는 술탄의 입장에서 예니체리가 다른 사회적, 종교적 세력에 동화되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만 충성하도록 만드는 효과적인 사회 공학적 장치였다. 이처럼 벡타쉬 신앙과 솥으로 상징되는 공동체 문화는 예니체리를 단순한 군사 조직을 넘어, 강력한 내부 결속력과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닌 하나의 ’신성 가족’으로 주조해냈다.
4. 제국의 최정예, 공포의 군단
4.1 조직, 훈련, 그리고 군율
예니체리는 ’오르타(orta)’라 불리는 연대 단위로 조직되었다. 전성기인 16세기에는 그 수가 1만 2천에서 1만 5천 명에 달했으며, 평시에는 수도 이스탄불과 주요 거점 도시에 주둔하며 국왕 경호, 치안 유지, 소방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3 이들의 훈련 과정은 ‘아제미 오을란(Acemi Oğlan)’, 즉 훈련병 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소년들은 수년간 혹독한 신체 단련, 무기 기술 습득, 그리고 절대적인 복종을 배우는 교육을 받았다.2
예니체리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철저한 능력주의에 기반한 진급 시스템이었다. 출신이나 배경이 아닌 오직 전장에서의 공훈과 개인의 능력만이 진급과 보상의 기준이 되었다.30 이는 병사들에게 강력한 동기를 부여했으며, 부대의 전투력을 최상으로 유지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들의 규율은 유럽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정도로 엄격했다. 전투 시에는 세계 최초의 군악대로 알려진 ’메흐테르(Mehter)’가 연주하는 웅장한 군악에 맞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적진으로 행진했다.4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대열을 유지하며 돌격하는 이들의 모습은 적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압박감을 주었고, ’악마의 군단’이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10 이처럼 혹독한 훈련, 공정한 보상 시스템, 그리고 철저한 군율의 삼박자가 어우러져 예니체리를 당대 최강의 보병 군단으로 만들었다.
4.2 화약 시대의 선구자: 전술과 무장
예니체리의 군사적 우위는 그들의 규율뿐만 아니라, 화약 무기를 선도적으로 도입하고 이를 전술에 효과적으로 통합시킨 데 있었다. 초기에는 활과 할버드, 검, 도끼 등으로 무장했으나 5, 1440년대에 이미 머스킷 화승총을 제식 무기로 채택했는데, 이는 대부분의 유럽 군대보다 수십 년 앞선 것이었다.9 이로써 예니체리는 강력한 원거리 화망을 구성할 수 있는 최초의 근대적 보병 부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유럽 군대처럼 일제 사격을 통한 화망 구성보다는, 개개인이 목표를 정밀 조준하여 사격하는 방식을 선호했다.9 이는 그들이 단순한 총잡이가 아니라 고도로 훈련된 전문 사수였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머스킷 사격은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포병대(‘톱추 오작’)의 지원을 받으며 시너지를 발휘했다.30
예니체리의 기본 전술은 막강한 화력을 이용해 적의 대열, 특히 유럽의 자랑이었던 중장기병의 돌격을 저지하고 분쇄하는 것이었다. 일단 원거리 사격으로 적의 기세를 꺾은 후에는, 그들의 상징적인 무기인 ’야타간(yatagan)’이라는 짧은 곡도를 들고 백병전에 돌입하여 적을 섬멸했다.32 특이하게도, 그들은 유럽 군대에서 보편화된 총검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는 총과 검을 각각의 전문적인 무기로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던 그들의 전투 철학을 반영한다.9 이처럼 예니체리는 화약과 냉병기를 결합한 독자적인 전술 체계를 발전시키며 화약 시대의 전장을 지배했다.
4.3 전성기의 영광: 주요 전투에서의 역할
예니체리는 오스만 제국이 세계적인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치러진 거의 모든 주요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의 이름이 역사에 깊이 각인된 대표적인 전투는 다음과 같다.
첫째,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전이다.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명성이 높았다. 수 주간에 걸친 공성전에서 비정규군과 일반 병사들의 공격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자,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최후의 카드로 예니체리를 투입했다.4 예니체리는 지칠 줄 모르는 공격으로 수비군을 압박했으며, 방어측의 실수로 ’케르카포르타(Kerkaporta)’라는 작은 성문이 열린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맹렬하게 돌진했다.11 성벽을 돌파한 이들은 방어탑을 점령하고 오스만의 군기를 꽂음으로써, 길고 긴 공성전의 마침표를 찍고 제국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둘째, 1526년 모하치 전투는 예니체리의 화력 전술이 정점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전투다. 헝가리 왕국은 유럽 최강으로 꼽히던 중장기병을 앞세워 오스만 군의 중앙을 돌파하려 했다. 그러나 오스만 군의 중앙에는 예니체리와 대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쉴레이만 1세는 의도적으로 중앙 부대를 후퇴시키며 헝가리 기사들을 유인했고, 이들이 사정거리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자 예니체리는 일제히 머스킷 사격을 가했다.12 촘촘하게 형성된 총탄의 벽 앞에 유럽 최강의 기사단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고, 헝가리 국왕을 포함한 지휘부 전체가 전사하며 왕국은 사실상 멸망했다.12 이 전투는 중세 기사 시대의 종말과 화약 보병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외에도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 정복,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합스부르크 제국과의 격전이었던 빈 공방전 등 제국의 운명을 건 수많은 전투에서 예니체리는 언제나 가장 어려운 임무를 맡아 승리를 가져왔다.4 그들은 단순한 군대를 넘어, 제국 팽창의 엔진이자 술탄의 권위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이처럼 예니체리는 당대의 다른 군사 조직과 비교할 때, 단순한 용맹함을 넘어 체계적인 훈련, 선진적인 무기 체계, 그리고 정교한 전술 운용 능력을 모두 갖춘 전문화된 군사 집단이었다. 유럽이 용병이나 봉건적 징집병에 의존하던 시기에, 오스만 제국은 이미 국가가 직접 관리하고 급료를 지급하는 상비군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3 이러한 전문성은 오스만 제국이 수 세기 동안 군사적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핵심적인 요인이었다.
5. 권력화와 부패의 서곡
5.1 창설 이념의 붕괴: 결혼, 세습, 그리고 외부 충원
오스만 제국의 가장 강력한 힘의 원천이었던 예니체리 시스템은 그 성공의 정점에서부터 내부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군단을 지탱하던 핵심 원칙들, 즉 독신주의, 비세습, 그리고 데브시르메를 통한 충원이라는 세 기둥이 16세기 후반부터 급격히 무너져 내렸다.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독신 규정이었다. 제국을 위해 평생을 바친 예니체리들은 자신들의 공헌에 대한 대가로 결혼할 권리를 요구했고, 술탄은 이들의 막강한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어 이를 허용했다.4 결혼이 허용되자 자연스럽게 자녀가 생겼고, 이들은 자신의 아들들이 안정적이고 명예로운 예니체리의 지위를 물려받기를 원했다.4 이는 ’술탄의 노예’로서 어떠한 세속적 연고도 갖지 않아야 한다는 군단의 창설 이념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었다.
결국 1568년, 퇴역한 예니체리의 아들들이 군단에 입대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1594년에는 문호가 더욱 넓어져 모든 자유민 무슬림이 예니체리에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2 이로써 데브시르메 제도는 그 의미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발칸의 기독교 소년들을 징집할 필요가 없어졌고, 이 제도는 17세기를 거치며 점차 유명무실해지다가 18세기 초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4
이러한 변화는 예니체리의 근본적인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술탄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초월적이고 고립된 엘리트 집단은, 이제 자신들의 기득권을 세습하려는 터키인 중심의 강력한 이익 집단으로 변모했다. 제국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예니체리는 이제 제국 내부에 뿌리내린, 통제하기 어려운 세력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처럼 예니체리의 변질은 단순한 기강 해이나 도덕적 타락의 문제가 아니었다. 제국의 핵심적인 성공 요인이었던 그들의 존재 자체가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보장해주었기에, 술탄들은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기 어려웠다. 즉, 예니체리의 성공이 역설적으로 그들을 타락시키는 조건을 만들어낸 것이다.
5.2 군인에서 이권 집단으로: 경제적·사회적 변모
충원 방식의 변화와 세습화는 예니체리의 사회·경제적 역할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전장에서의 역할이 줄어들고 평화 시기가 길어지면서, 이들은 점차 도시 경제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주둔 도시의 상인이나 수공업자들에게 보호세를 뜯어내거나, 직접 상업 및 제조업에 뛰어드는 예니체리들이 늘어났다.4
그들은 더 이상 병영에만 머무는 전사가 아니라, 시장의 질서를 좌우하고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강력한 사회 세력이 되었다. 예니체리에게 지급되는 급료 증명서는 시장에서 화폐처럼 유통되었고, 18세기에는 실제 복무하는 병사의 수보다 훨씬 많은 수의 유령 예니체리들이 명부에 올라 국가 재정을 축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37 이는 군단 전체가 조직적인 부패의 온상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자신들의 막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새로운 술탄이 즉위할 때마다 거액의 즉위 하사금을 요구하며 길거리에서 약탈을 일삼는 것이 관례가 되었고,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재상이나 관료들을 위협하여 실각시키는 일도 잦았다.30 ‘솥을 엎는’ 그들의 집단행동은 이제 외부의 적이 아닌, 제국 내부의 정적을 향한 위협이 되었다. 이로써 예니체리는 국가를 방위하는 군대에서 국가 재정을 좀먹고 정치적 안정을 해치는 특권적 이권 집단으로 완전히 변질되었다.
5.3 최초의 경고: 오스만 2세 시해 사건
예니체리가 술탄의 통제를 벗어난 괴물로 변모했음을 보여준 충격적인 사건이 1622년에 발생했다. 젊고 야심만만했던 술탄 오스만 2세는 1621년 폴란드 원정에서의 패배를 예니체리의 기강 해이와 전투력 약화 탓으로 돌렸다.4 그는 이 부패한 군단을 해체하고, 아나톨리아의 투르크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군대를 창설하려는 급진적인 개혁을 비밀리에 추진했다.13
그러나 이 계획은 곧 예니체리들의 귀에 들어갔다.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고 느낀 예니체리들은 즉각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궁궐로 난입하여 오스만 2세를 폐위시키고 감금한 뒤, 며칠 후 그를 잔인하게 살해했다.3 이는 오스만 제국 역사상 전례가 없는, 신하가 군주를 시해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오스만 2세의 시해는 제국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는 예니체리가 단순히 정책에 반대하는 수준을 넘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술탄을 제거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과 의지를 가졌음을 만천하에 공표한 사건이었다. 술탄의 ’노예’가 주인을 살해한 이 사건을 기점으로, 술탄과 예니체리의 권력 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예니체리는 이제 술탄의 충실한 경호대가 아니라, 술탄을 감시하고 심판하는 옥좌 위의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었다. 이 사건은 향후 200년간 이어질 예니체리의 정치적 폭주와 제국의 혼란을 예고하는 비극적인 서막이었다. 이들의 행동은 더 이상 술탄 개인에 대한 충성심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다. 예니체리라는 거대한 집단의 생존과 이익이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시되었으며, 술탄조차도 이 집단적 이기심의 장애물이 될 경우 제거될 수 있다는 무서운 선례를 남긴 것이다.
6. 제국의 암, 개혁의 걸림돌
6.1 프라이토리아니즘의 고착화: 술탄을 능가하는 권력
오스만 2세 시해 이후, 예니체리의 정치 개입은 더욱 노골적이고 상습적으로 변모했다. 이들은 고대 로마의 프라이토리아니(Praetorian Guard)처럼 황제를 옹립하고 폐위시키는 ‘킹메이커’ 역할을 자처하며 오스만 정치의 중심에 섰다.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수많은 재상들이 예니체리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거나 실각했으며, 술탄들 역시 이들의 눈치를 살피며 꼭두각시처럼 행동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3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조금이라도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개혁 시도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솥을 뒤엎으며’ 무력으로 저항했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여 절실히 필요했던 군사, 행정, 재정 개혁의 동력을 완전히 상실했다.39 예니체리는 제국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키는 방패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견고한 벽이 되어버렸다. 오스만 제국은 사실상 술탄이 통치하는 군주국이 아니라, 예니체리라는 군사 귀족 집단이 지배하는 ’군사 공화국’과 같은 기형적인 정치 체제로 전락했다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였다.39
6.2 전장에서의 몰락: 군사적 무력화의 증거
정치적 영향력이 비대해지는 것과 정반대로, 예니체리의 군사적 역량은 급격히 쇠퇴했다. 상업과 정치에 몰두하면서 군사 훈련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한때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엄격한 규율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유럽 군대가 끊임없이 새로운 전술(선형 진법 등)과 기술(수석식 머스킷, 총검 등)을 도입하며 발전하는 동안, 구시대적인 방식만을 고집하며 어떠한 변화도 거부했다.9
그 결과는 전장에서의 연이은 패배로 나타났다. 17세기 후반부터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와 신흥 강국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오스만 군대는 연전연패했으며, 예니체리는 더 이상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1621년 폴란드와의 전투에서 12만 대군을 동원하고도 패배한 것은 그들의 군사적 무력화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4 1820년대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는 반란군을 효과적으로 진압하지 못하며 과거의 명성이 완전히 빛을 바랬음을 증명했다.30 한때 제국의 자랑이었던 최정예 군단은 이제 막대한 국고를 낭비하면서도 제 역할을 못 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것이다.
6.3 개혁의 좌절: ’니자므 제디드’와 셀림 3세의 비극
이러한 총체적 위기 상황 속에서, 계몽군주를 자처한 술탄 셀림 3세(재위 1789-1807)는 제국의 생존을 위해 과감한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예니체리를 대체할 새로운 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프랑스 군사 고문단의 도움을 받아 유럽식으로 훈련되고 무장한 신식 군대 ’니자므 제디드(Nizam-ı Cedid, 새로운 질서)’를 창설했다.3
이는 예니체리의 군사적 독점권과 기득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니자므 제디드’가 성공적으로 정착한다면 자신들의 존재 가치가 사라질 것을 두려워한 예니체리는 격렬하게 반발했다. 결국 1807년, 예니체리는 울레마(보수 율법학자) 세력과 결탁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니자므 제디드’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개혁을 주도했던 셀림 3세를 폐위시킨 후 이듬해 살해했다.3
셀림 3세의 비극적인 최후는 예니체리가 제국 근대화의 가장 큰 걸림돌임을 다시 한번 입증한 사건이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개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구조적 모순이었던 것이다. 예니체리의 저항은 단순히 보수적인 성향 때문이 아니었다. 군사적 근대화는 곧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독점권의 종말을 의미했기에, 이는 그들에게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따라서 그들은 제국의 미래를 희생시키더라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셀림 3세의 실패는 후임자인 마흐무트 2세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예니체리를 개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불가능하며, 유일한 해법은 그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7. ’상서로운 사건’과 소멸
7.1 마흐무트 2세의 치밀한 복수: 20년의 기다림
사촌 형인 셀림 3세의 비극을 목격하며 즉위한 술탄 마흐무트 2세는 섣부른 개혁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즉위 초 예니체리의 공격으로 자신을 옹립했던 재상이 살해당하는 등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복수의 칼날을 숨긴 채 약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인내하며 힘을 길렀다.18
그는 겉으로는 개혁에 의지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며 예니체리를 방심하게 만드는 한편, 물밑에서는 치밀하게 그들을 제거할 준비를 해나갔다.17 가장 중요한 작업은 예니체리를 대체하고 제압할 수 있는 충성스러운 군사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는 예니체리의 감시를 피해 포병대, 공병대 등 기술 부대를 중심으로 유럽식 훈련을 도입하고 신식 무기를 보급하며 조용히 친위 세력을 키웠다.3
동시에 그는 정치적, 종교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예니체리의 부패와 월권 행위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울레마(율법학자)와 고위 관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마침내 그는 신식 군대 창설이 샤리아(이슬람 율법)에 어긋나지 않으며, 국가에 불복종하는 예니체리는 이단이라는 내용의 파트와(fatwa, 종교적 칙령)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17 이로써 예니체리 제거는 술탄의 정치적 결단을 넘어, 종교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있는 성전(聖戰)의 명분을 얻게 되었다.
7.2 1826년, 최후의 저항과 학살
모든 준비를 마친 마흐무트 2세는 1826년 6월, 마침내 칼을 뽑아 들었다. 그는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겠다는 칙령을 발표하며 의도적으로 예니체리를 자극했다. 예상대로 예니체리들은 즉각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전통적인 저항의 표시로 솥을 뒤엎고 이스탄불의 아흐메트 광장(옛 히포드롬)으로 집결하여 술탄에게 개혁 철회를 요구했다.3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마흐무트 2세는 이들의 반란을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 대응에 나섰다. 그는 미리 준비해 둔 충성스러운 포병 부대를 동원하여 예니체리들이 집결한 광장과 그들의 병영을 포위했다.3 예니체리들은 자신들이 화력 면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에 놓여있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마흐무트 2세는 협상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는 포병대에 병영을 향해 무차별 포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5문의 신식 대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고, 예니체리 병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3 좁은 공간에 갇힌 예니체리들은 신식 대포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학살당했다. 이 포격으로 단 몇 시간 만에 수천 명의 예니체리가 목숨을 잃었다.4 이는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소탕 작전이었다. 술탄의 오랜 분노가 담긴 포화 속에서, 한때 제국을 호령했던 군단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7.3 500년 역사의 종언
병영 포격 이후에도 예니체리에 대한 소탕은 계속되었다. 마흐무트 2세는 이스탄불 전역에 계엄을 선포하고, 살아남은 예니체리 잔당들을 색출하여 처형하거나 유배 보냈다.3 그들의 모든 재산은 몰수되었고, 정신적 지주였던 벡타쉬 교단 역시 이단으로 규정되어 폐쇄되었다. 2년에 걸친 철저한 숙청 작업 끝에, 약 500년간 오스만 제국의 역사와 함께했던 예니체리 군단은 지도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3
오스만 제국은 이 사건을 ‘바카이 하이리예(Vaka-i Hayriye)’, 즉 ’상서로운 사건’이라고 명명했다.4 제국의 발전을 가로막던 가장 큰 암 덩어리를 제거했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예니체리의 해체는 마흐무트 2세가 본격적인 서구식 근대화 개혁, 즉 탄지마트(Tanzimat) 시대를 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17
그러나 예니체리의 소멸은 단순한 군부대 해체를 넘어, 하나의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제국의 영광과 치욕을 모두 함께했던 상징적인 존재가 사라진 것이다. 그들의 폭력적인 종말은 오스만 제국이 생존을 위해 과거와 단절하고 고통스러운 근대화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주는 극적인 사건이었다. 예니체리의 해체는 군사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과정은 국가가 자신의 가장 강력했던 창조물을 스스로 파괴해야만 했던 제국의 비극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8. 역사적 평가와 유산
8.1 양날의 검: 제국의 창조자이자 파괴자
예니체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단적인 양면성을 띨 수밖에 없다. 그들은 오스만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공 신화의 주역이자, 가장 참담한 실패의 원인이었다.
창설 초기, 예니체리는 “기적의 시스템“이라 불릴 만한 혁신적인 제도였다.15 데브시르메라는 파격적인 방식을 통해 혈연과 신분을 초월한 능력주의 엘리트 집단을 만들어냈고, 이를 통해 술탄의 절대 권력을 확립하고 제국의 영토를 비약적으로 확장시켰다. 그들은 화약 시대의 도래를 이끈 군사적 선구자였으며, 그들의 존재 자체가 오스만 제국이 당대 유럽의 봉건 국가들을 압도할 수 있었던 핵심적인 힘의 원천이었다.15 이 시기의 예니체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제국의 가장 위대한 창조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위대한 창조자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괴물로 변모했다. 자신들의 불가결성을 무기로 기득권을 획득하고, 세습을 통해 그 특권을 고착시키면서 창설 이념을 상실했다. 그들은 변화를 거부하고 개혁에 저항하며 제국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되었다.15 정치에 개입하여 국정을 혼란에 빠뜨리고, 정작 국방의 의무는 소홀히 하여 제국의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결국, 제국의 생존을 위해 탄생했던 조직이 제국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큰 암적 존재가 되는 역설적인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예니체리의 역사는 하나의 제도가 시대적 소명을 다한 뒤 어떻게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배반하고 역사의 짐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8.2 문화적 잔향과 부정적 유산
500년에 걸친 예니체리의 역사는 오스만 제국뿐만 아니라 유럽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그들의 군악대였던 ’메흐테르’는 독특한 리듬과 악기 구성으로 유럽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을 비롯한 여러 클래식 음악에서 그 이국적인 선율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4
그러나 대부분의 유산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아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발칸 반도의 국가들에서는 ’예니체리’라는 단어 자체가 ‘민족의 배신자’ 혹은 ’잔혹한 압제자’와 동의어로 사용된다.21 이는 데브시르메 제도를 통해 강제로 가족과 종교를 빼앗기고, 동족을 억압하는 도구로 변해야 했던 소년들의 비극과 그로 인한 민족적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 <폭력의 시대>에서 묘사된 것처럼, 예니체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동족에게 개종을 강요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이미지는 이러한 역사적 상처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25
8.3 현대적 재해석: 수구 집단인가, 민중의 대변자인가?
전통적인 역사 서술에서 후기 예니체리는 부패하고 무능한 수구 집단으로만 묘사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은 보다 복합적이고 nuanced한 시각을 제시한다. 특히 도널드 쿼터트(Donald Quataert)와 같은 학자들은 예니체리가 단순히 기생적인 군사 집단이 아니라, 당대 오스만 도시 사회의 구조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복합적인 사회 세력이었다고 주장한다.19
이 관점에 따르면, 예니체리들은 도시의 수공업자나 상인들과 깊은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이들에게 보호세를 뜯는 폭력 집단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 정부의 과도한 세금이나 엘리트 관료들의 전횡으로부터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중적 민병대’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는 것이다.19 즉, 예니체리의 반란이 항상 자신들의 이기적인 기득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도시 민중의 불만을 대변하는 정치적 행위의 성격을 가졌을 수 있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재해석은 예니체리를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단순한 시각에서 벗어나, 그들이 18-19세기 오스만 제국이라는 다층적인 사회 속에서 수행했던 복잡한 역할을 이해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예니체리의 해체가 군사적 근대화를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음은 분명하지만, 그 과정에서 도시 하층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던 하나의 정치적 매개체가 사라졌다는 측면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9. 결론
예니체리의 500년 역사는 오스만 제국의 영광과 쇠퇴, 그리고 고뇌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서사시다. 그들은 유목 제국의 군사적, 정치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천재적인 제도적 발명품이었다. 데브시르메라는 비인륜적인 시스템을 통해 길러진 이 ’술탄의 노예들’은 혈연과 지연에서 자유로웠기에 오직 술탄에게만 충성했고, 당대 최강의 전투력으로 제국의 팽창을 이끌었다. 그들은 제국의 가장 견고한 기둥이자 가장 날카로운 검이었다.
그러나 절대적인 힘은 필연적으로 부패를 낳았다. 제국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예니체리는 스스로가 기득권이 되어 창설 이념을 배반했다. 결혼과 세습이 허용되면서 그들은 더 이상 고립된 엘리트가 아닌,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거대한 압력 단체로 변모했다. 전장에서의 용맹함은 사라지고, 정치판에서의 탐욕만이 남았다. 결국 제국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역설적으로 제국의 생존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되었다.
1826년 ’상서로운 사건’을 통해 예니체리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은, 오스만 제국이 과거의 영광과 단절하고 고통스러운 근대화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소멸은 제국의 군사력을 일시적으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예니체리는 오스만 제국이라는 거대한 유기체의 가장 강력한 면역체계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스스로를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한 제도의 성공이 어떻게 그 자신의 실패를 잉태하는지, 그리고 기득권에 안주한 조직이 시대의 변화 앞에서 어떻게 도태되고 파괴되는지에 대한 냉엄한 역사적 교훈을 남긴다. 예니체리는 오스만 제국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었고, 동시에 가장 비극적인 실패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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